메와 왕국의 왕, 구히르 왕조의 라왈 분파의 마지막 왕, 라트나심하
델리 술탄국의 알라우딘 킬지에게 함락당한 메와 왕국의 마지막 왕은 라트나심하(Ratnasimha, 재위 1302~1303)이다. 그는 영화 ⟪파드마바트⟫에서 라탄 싱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말릭 무하마드 자야시의 1540년 작품 ⟪파드마바트⟫에서는 라탄 센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파드마바티의 남편의 실존 모델이라고 한다. 역사학자들이 파드마바티가 실존인물이 아닐 거라고 믿는 것에 반해, 라트나심하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다리바 사원에 1302년에 그가 16개의 금화를 봉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그가 재위한 시절에 그의 이름으로 발행한 금화 또한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14세기에 한 왕국의 왕이었음에도 기록이 매우 부족하고 그의 일생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라트나심하가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남자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라트나심하의 치토가르 요새 by Ssjoshi111 [CC BY-SA 3.0], from Wikimedia Commons |
라자스탄, 구자라트 지역의 패권인 구히라 왕조(Guhira Dynasty)의 두 분파, 라왈 분파(Rawal branch)와 라나 분파(Rana branch) 중 라트나심하는 라왈 분파의 마지막 왕이다. (라트나심하가 알라우딘 킬지에게 패배해서 라왈 왕조는 라트나심하를 마지막으로 대가 끊어지고, 킬지가 델리로 돌아간 후에, 라왈 분파의 방계 가족이 이 지역(메와)에서 힘을 모아 시소디아 라즈풋 왕조를 일으킨다. 시소디아 왕조의 역사는 130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역사 기록에서 라트나쉬마의 종말
영화 ⟪파드마바트⟫에서처럼 라트나심하가 라즈풋의 기개를 드높이는 장렬한 죽음을 맞았을까에 대해선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신빙성있는 기록들은 이 왕이 실제로 살아남아서 항복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믿고싶지 않다 이거냐?)
무슬림 사관의 기록:
1303년 델리 술탄국의 지배자 알라우딘 칼지가 메와 왕국의 견고한 요새(현재지명: 치토르)를 침략할 때, 기록관인 아미르 쿠스라우가 동행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치토르의 지배자(라트나심하)가 알라우딘에게 항복했다고 한다.(치토르의 왕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있었다고 적었다.) 메와를 함락한 알라우딘 킬지는 하루 동안 30000명의 힌두교도들을 학살했지만, 치토르 지배자와 그의 가족들은 사면해줬다고 한다. 알라우딘은 자신의 어린 아들 키즈르 칸khizr Khan을 치토르의 지배자로 앉히고 말릭 샤힌을 실질적인 행정관으로 앉혔다. 그리고 치토르를 키즈라바드khizrabad로 이름을 바꾼 뒤 델리로 돌아갔다.
아미르 쿠스라우의 기록은 14세기의 무슬림 사관인 지아우딘 바라니와 이사미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정확할 것이라고 본다.
다른 역사학자는 알라우딘 킬지가 하룻동안 3만명의 힌두교도를 학살하게 명령하면서 그들의 지배자인 왕은 살려뒀을까 의문을 갖는다.
자인교도 작가의 기록:
자인교도 작가인 카카 수리는 1336년에 쓴 나비난다나 지노다라 프라반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알라우딘은 치토르의 왕을 생포했다. 그의 전재산을 몰수한 뒤에, 그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원숭이같이 끌고다니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사실 영화 ⟪파드마바트⟫에서조차 라탄 싱은 무력해보였다
힌두교 역사가의 기록:
그럼, 라트마쉬마와 같은 힌두교 신자인 역사가의 기록은 어떨까? 1460년에 쓰여진 쿰발가르 프라샤스티는 구히라 왕조, 라나 분파의 쿰바카르나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라트마심하는 떠났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이 '떠났다'가 천국으로 떠났다 즉 용감하게 싸워서 죽었다는 뜻이라는 주장과, 문맥상 말 그대로 떠났다, 즉 도망쳤다는 뜻이라는 주장이 둘 다 있다.
알라우딘 킬지의 치토르 포위가 있은 지 200년이 지나서 1500년대에 나온 시 ⟪파드마바트⟫에서는 라탄 센이 알라우딘이 메와에 오기도 전에 쿰발네르의 왕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나온다. 17세기 라즈풋 역사가도 그가 전투 중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내 추측에는, 라즈풋 왕 라트나심하의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 것 같다. 1300년대의 기록들은 그가 전투에서 죽지 않았고 비굴하게 항복했고, 원숭이처럼 끌려다니는 수모를 당했다고 적혀있다. 그와 그의 가족(그는 부인이 15명이었다)은 알라우딘 킬지가 사면해주었다고 (킬지의 사관에 의해) 적혀있지만,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원숭이처럼 끌려다녔다는 기록, 그리고 그의 대에서 라왈 가계가 끊겼고, 불가 몇년 후에 이 지역에서 방계 가족이 시소디아 왕조를 다시 세웠음에도 라트나시마의 후손에 대한 기록조차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천민 카스트로 떨어지는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추측일 뿐이다) 그래서 몇백년 후에, 문학작품으로 '아름다운 부인을 탐하는 사악한 무슬림 폭군에 맞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왕'으로 재탄생시켜서 이 수모의 서러움을 달래준 게 아닐까 싶다. 라즈풋의 기개와 의리를 보여주는 ⟪파드마바트⟫의 조하르 또한 이 라즈풋 왕과 그의 가족들, 라즈풋들이 당시에 겪은 수모를 달래고 잊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때 조하르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고 한다. 다만 힌두교 라즈풋 역사가들은 그 시절에 라즈풋 여성들이 조하르를 실행하곤 했으니까, 킬지의 치토르 함락때도 분명 있었을 거다!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렇게 적고나니, 파드마바티 이야기는 라즈풋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즈풋들은 의리, 충정, 불의를 못참는 성격 등으로 유명한데, 라즈풋들은 라즈풋 왕인 라트나심하가 무슬림 왕에게 항복하고 수치를 당했다는 기록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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