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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a the best fashionista in Padmaavat



영화 ⟪파드마바트⟫에서 고라는 라탄 싱의 충신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았음에도, 아름다운 의상과 액세서리로 눈에 많이 띄었다.

⟪파드마바트⟫의 의상은 스타 배우들((디피카파두콘, 란비르 샤히드, 아디티)은 림플과 하프리트 나룰라가 맡았고, 조연들은 막시마 바수가 디자인했다. 그리고 엑스트라들은 찬드라칸트 소나완, 아제이 크므르가 담당했는데, 주연배우들의 의상보다 조연이나 엑스트라의 의상들이 더 예뻤다.

그 중에 가장 예뻤던 바수의 의상들을 모아봤다.




고라의 의상은 대개 밝은 색으로 삭막한 라즈스탄 풍경과 잘 어울렸다.
잔잔한 패턴들을 레이어링했다.




파란색이든 붉은색이든 밝은 색상에 얌전한 패턴으로 매치했는데, 칙칙한 중년남성의 외모에 매우 잘 어울리고 화사해보이게 한다.





낮에는 밝은 색의 옷을 입다가
어두운 밤이 되니 어두운 색 옷을 입는 패셔니스타 고라.
웃도리에 목걸이 모양으로 금색 자수가 놓여있다.




고라는 고향의 왕궁에서는 화사하고 밝아서 편안한 분위기를 내는 의상을 주고 입고,
위급한 상황에 왕비를 모시고 적군으로 갈 때는
차분한 느낌의 짙은 색상의 옷을 입었다.

 이 옷 또한 매우 우아해서 감탄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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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바트]에서 라탄 싱의 의상 - 이것이 라즈풋 패션이다!



Ratan Singh's costumes in Padmaavat; Beautiful and bold jewelry for men.











영화 ⟪파드마바트⟫는 산제이 릴라 반살리 감독의 영화로 이 감독은 아름답고 화려한 화면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는 배경, 배우, 옷차림 등 모든 것이 눈부시게 화려하다.

1303년, 인도의 메와 왕국(현재 라자스탄 주)를 배경으로 하는 ⟪파드마바트⟫는 고증을 철저하게 한 영화라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의상들이 얼마나 고증에 철저한지는 전혀 모르겠다.


19세기, 20세기의 마하라자(라자스탄 왕을 뜻한다. 왕비나 여왕은 마하라니라고 부름)들이 화려한 보석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던 것은 그 시절 사진이 남아있으니 안다. 인도가 1200~1300년대도 정교한 보석 세공술이 발달했고 일개 소국의 왕이 보석으로 칭칭 감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참고: 라탄 싱의 실제모델, 라트나심하의 최후
https://offhoarder.blogspot.com/2018/12/padmaavat-ratnasimha.html













샤히드 카푸르가 연기한 라탄 싱은 메와 왕국의 왕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알록달록한 보석이 남자에게도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도 이렇게나 보석이 잘 어울리는데, 현대 남성 패션은 많이 퇴보한 것 같다.
패션에 있어서 남자는 하면 안되는 게 너무나 많다.






라벤더 컬러에 골드와 버건디를 매치시켰다.




1800년대 라자스탄의 마하라자는
위와 같은 터번 장식을 실제로 했었다.

터번의 뒷모습. 패턴과 패턴의 조합이 다채롭다.











왼쪽 상완의 팔찌.






왕의 내의 또한 매우 고급스러웠다.


귀걸이가 매우 잘 어울린다.




이건 요즘에 파자마로 팔아도 잘 팔릴 듯.

자수도 남자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


초상화가 그러진 펜던트 목걸이는
모굴제국 시절에 실제로 있었다.
이 옷은 앞여밈에 누빔까지 있어서 한복처럼 보인다.








그리고 왕의 신발도 금빛 수가 정교하게 놓여져있다.
이 영화의 의상디자이너가 옷의 무늬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잘 안보여서 안타까웠다.




배경도 금칠 범벅이라서 화려하고 밝은 옷차림과 잘 어울렸다 .






영화 후반에서는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라탄 싱 왕의 의상들이 가벼워졌다.


치렁치렁 걸쳐입은 옷들은 간소화되고 보석들도 종류가 줄어들고 미니멀해졌다.












팔뚝에 맨 보석팔찌도 매우 남성적으로 보인다.






















신기했던 것은 전투복이 우리나라의 것과 비슷했던 거.







전투 양상이 비슷하니 문화권과 상관없이 비슷한 디자인으로 개발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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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바트] 라탄 싱의 실제모델인 라트나심하의 최후




메와 왕국의 왕, 구히르 왕조의 라왈 분파의 마지막 왕, 라트나심하 


델리 술탄국의 알라우딘 킬지에게 함락당한 메와 왕국의 마지막 왕은 라트나심하(Ratnasimha, 재위 1302~1303)이다. 그는 영화 ⟪파드마바트⟫에서 라탄 싱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말릭 무하마드 자야시의 1540년 작품 ⟪파드마바트⟫에서는 라탄 센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파드마바티의 남편의 실존 모델이라고 한다. 역사학자들이 파드마바티가 실존인물이 아닐 거라고 믿는 것에 반해, 라트나심하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다리바 사원에 1302년에 그가 16개의 금화를 봉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그가 재위한 시절에 그의 이름으로 발행한 금화 또한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14세기에 한 왕국의 왕이었음에도 기록이 매우 부족하고 그의 일생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라트나심하가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남자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라트나심하의 치토가르 요새 by Ssjoshi111 [CC BY-SA 3.0], from Wikimedia Commons 


라자스탄, 구자라트 지역의 패권인 구히라 왕조(Guhira Dynasty)의 두 분파, 라왈 분파(Rawal branch)와 라나 분파(Rana branch) 중 라트나심하는 라왈 분파의 마지막 왕이다. (라트나심하가 알라우딘 킬지에게 패배해서 라왈 왕조는 라트나심하를 마지막으로 대가 끊어지고, 킬지가 델리로 돌아간 후에, 라왈 분파의 방계 가족이 이 지역(메와)에서 힘을 모아 시소디아 라즈풋 왕조를 일으킨다. 시소디아 왕조의 역사는 130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역사 기록에서 라트나쉬마의 종말



영화 ⟪파드마바트⟫에서처럼 라트나심하가 라즈풋의 기개를 드높이는 장렬한 죽음을 맞았을까에 대해선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신빙성있는 기록들은 이 왕이 실제로 살아남아서 항복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믿고싶지 않다 이거냐?)



무슬림 사관의 기록:

1303년 델리 술탄국의 지배자 알라우딘 칼지가 메와 왕국의 견고한 요새(현재지명: 치토르)를 침략할 때, 기록관인 아미르 쿠스라우가 동행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치토르의 지배자(라트나심하)가 알라우딘에게 항복했다고 한다.(치토르의 왕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있었다고 적었다.)  메와를 함락한 알라우딘 킬지는 하루 동안 30000명의 힌두교도들을 학살했지만, 치토르 지배자와 그의 가족들은 사면해줬다고 한다. 알라우딘은 자신의 어린 아들 키즈르 칸khizr Khan을 치토르의 지배자로 앉히고 말릭 샤힌을 실질적인 행정관으로 앉혔다. 그리고 치토르를 키즈라바드khizrabad로 이름을 바꾼 뒤 델리로 돌아갔다. 



아미르 쿠스라우의 기록은 14세기의 무슬림 사관인 지아우딘 바라니와 이사미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정확할 것이라고 본다. 
다른 역사학자는 알라우딘 킬지가 하룻동안 3만명의 힌두교도를 학살하게 명령하면서 그들의 지배자인 왕은 살려뒀을까 의문을 갖는다. 













자인교도 작가의 기록:

자인교도 작가인 카카 수리는 1336년에 쓴 나비난다나 지노다라 프라반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알라우딘은 치토르의 왕을 생포했다. 그의 전재산을 몰수한 뒤에, 그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원숭이같이 끌고다니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사실 영화 ⟪파드마바트⟫에서조차 라탄 싱은 무력해보였다




힌두교 역사가의 기록:

그럼, 라트마쉬마와 같은 힌두교 신자인 역사가의 기록은 어떨까? 1460년에 쓰여진  쿰발가르 프라샤스티는 구히라 왕조, 라나 분파의 쿰바카르나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라트마심하는 떠났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이 '떠났다'가 천국으로 떠났다 즉 용감하게 싸워서 죽었다는 뜻이라는 주장과, 문맥상 말 그대로 떠났다, 즉 도망쳤다는 뜻이라는 주장이 둘 다 있다.




알라우딘 킬지의 치토르 포위가 있은 지 200년이 지나서 1500년대에 나온 시 ⟪파드마바트⟫에서는 라탄 센이 알라우딘이 메와에 오기도 전에 쿰발네르의 왕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나온다. 17세기 라즈풋 역사가도 그가 전투 중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내 추측에는, 라즈풋 왕 라트나심하의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 것 같다. 1300년대의 기록들은 그가 전투에서 죽지 않았고 비굴하게 항복했고, 원숭이처럼 끌려다니는 수모를 당했다고 적혀있다. 그와 그의 가족(그는 부인이 15명이었다)은 알라우딘 킬지가 사면해주었다고 (킬지의 사관에 의해) 적혀있지만,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원숭이처럼 끌려다녔다는 기록, 그리고 그의 대에서 라왈 가계가 끊겼고, 불가 몇년 후에 이 지역에서 방계 가족이 시소디아 왕조를 다시 세웠음에도 라트나시마의 후손에 대한 기록조차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천민 카스트로 떨어지는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추측일 뿐이다) 그래서 몇백년 후에, 문학작품으로 '아름다운 부인을 탐하는 사악한 무슬림 폭군에 맞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왕'으로 재탄생시켜서 이 수모의 서러움을 달래준 게 아닐까 싶다. 라즈풋의 기개와 의리를 보여주는 ⟪파드마바트⟫의 조하르 또한 이 라즈풋 왕과 그의 가족들, 라즈풋들이 당시에 겪은 수모를 달래고 잊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때 조하르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고 한다. 다만 힌두교 라즈풋 역사가들은 그 시절에 라즈풋 여성들이 조하르를 실행하곤 했으니까, 킬지의 치토르 함락때도 분명 있었을 거다!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렇게 적고나니, 파드마바티 이야기는 라즈풋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즈풋들은 의리, 충정, 불의를 못참는 성격 등으로 유명한데, 라즈풋들은 라즈풋 왕인 라트나심하가 무슬림 왕에게 항복하고 수치를 당했다는 기록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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