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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샤 반단 - 우애를 다지는 힌두 축제

락샤 반단(Raksha Bandhan)은 인도에서 인기있는 힌두 축제로, 형제, 남매, 자매 간 또는 친한 친구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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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차얏 - 인도의 마을회의

구자라티 영화 〈헬라로〉에 나온 1975년의 판차얕 모습

판차얏 



인도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마을 회의. 마을 사람들이 공터에 앉아 마을의 대소사를 두고 장로들이 판결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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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파트 전투 - 인도 대륙의 역사를 바꾼 세 번의 전투


첫번째 파티파트 전투 1526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파니파트 


파티파트는 북인도의 하리아나 주에 위치한 인구 120만명의 작은 도시이다. 인도 역사에 중요한 전쟁이 세차례나 벌어진 곳인데, 지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여서가 아니라, 파니파트가 있는 지역이 평원이라서 전쟁하기 수월했기 때문에 세번이나 대전투가 벌여졌다고 한다. 


파니파트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전쟁에서 결정권자가 결정적인 판단, 준비 또는 전략이 없어 우왕좌왕하다가 적군에 영토를 내어주는 경우를 말한다. 20세기 인도의 유명한 공군 준장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가 잦은 실수로 인해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패한 것에서 따왔다.  


3차 파니파트 전투 당시 인도 대륙. 델리의 북쪽으로 파니파트가 보인다
Charles Colbeck / Public domain




첫 번째 파니파트 전투 


1526년 4월 21일 
티무르의 바부르  VS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 

결과: 델리 술탄국의 멸망과 무굴제국 창시


가운데 이브라힘 로디의 목이 있다. 아래쪽에 전투 코끼리
Public domain


바부르는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인도 침략에 나선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와 파니파트에서 전쟁해서 대승을 거둔다. 이브라힘 로디는 이 전쟁에서 죽는다. 이로서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가 끝나고 바부르는 무굴 제국을 개국한다. 


바부르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야포(소형 대포)를 약 20기 동원했다고 한다. 델리 술탄 왕조는 바부르 측보다 두 배 이상 많은 5만명의 군인과 무려 1000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하고도 완패했다. 군사 수가 더 많음에도 총이라는 근대 기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나보다.

아브라힘 로디의 묘
하리아나 관광

파니파트에는 아브라힘 로디의 묘가 남아있다. 아브라힘 로디는 델리 술탄국의 마지막 왕이다. 묘가 여태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황제의 묘임에도 매우 초라한 것도 인상적이다.







두 번째 파니파트 전투




1556년 11월 5일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VS 힌두왕 헤무


결과: 악바르 대제의 등장과 무굴제국 번영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이 갑자기 죽어서 무굴제국의 후계에 혼란이 생긴 틈에 벵갈 지역의 힌두교 왕 헤무가 힌두교 영토 회복을 위해 델리로 진격했다.  
후마윤의 아들로 당시 13살이었던 악바르 대제와 그의 후견인 바이람 칸이 파니파트에서 헤무를 물리쳤다. 


헤무왕의 패배. 자세히 보면 전투 코끼리들이 활약하고 있다. 왜 웃고 있니



헤무 측은 3만명의 기사와 5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동원했지만 악바르 측의 만 명의 기사에 패했다. 악바르 측은 사상자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헤무 측은 5000명 사상자 발생. 

원래 헤무 측이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전투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무 왕이 화살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군대를 지휘할 리더가 사라지니 그의 군사들도 와해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헤무 왕의 전투 코끼리 500마리의  활약이 대단해서, 이를 목도한 무굴제국도 전투 코끼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헤무 왕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거의 죽은 상태로 생포되었다. 현장에서 악바르가 참수했다. 사실은 악바르의 후견인인 바이란 칸이 13살의 악바르에게 헤무의 목을 베라고 시켰으나, 악바르는 시체의 목을 베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바이란 칸이 설득해서 악바르는 목에 칼을 대는 시늉만 하고 바이람 칸이 헤무의 목을 베었다. 그의 목은 카불에 있는 델리 기념문 (Delhi Darwaza)에 내걸렸고, 목 없는 몸은 델리에 있는 푸라나 킬라(Purana Qila)에 걸렸다. 푸라나 킬라는 델리에 있는 가장 오래된 요새이자 관광지로 헤무왕이 자신의 황제 대관식을 한 곳이라고 한다. 


Raja Hemu's 'Beheading Place'
힌두 양식으로 지어진 헤무의 참수 기념관
Sudhirkbhargava / CC BY-SA

파니파트에 헤무의 목을 참수한 장소에 헤무의 참수 이벤트를 기념하는 헤무의 사마디 스딸(Hemu's Samadhi Sthal)가 남아있다. 

하리와나 주의 르와리에는 헤무 왕의 하벨리(대저택)이 있다. 그의 대저택은 1540년, 헤무 왕이 무역으로 잘나가던 시절에 포르투갈 스타일로 단장했다고 한다. 

Colonial architecture in Hemu's Haveli in Rewari
르와리(Rewari)에 남아있는 헤무의 하벨리 
Sudhirkbhargava / CC BY-SA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




1761년 1월 14일
마라타 제국의 사히브라오 바우 VS 두라미 왕국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

결과: 마라타 제국의 상승세가 파니파트 전투로 꺾임. 마라타 제국이 약해지면서 영국의 인도 침략이 쉬워져서 불과  50년 후에 마라타 제국(동맹)은 영국에 패하고 와해된다.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의 죽음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된 델리 왕국은 신흥 강호 마라타 제국의 보호 하에 들어간다.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왕국인 두라니 왕조가 들어서자, 마라타의 보호를 받는 무굴 제국은 두라니 왕조에게 마라타의 확장을 막아달라 부탁한다. 

당시에 마라타 제국은 델리를 지나 펀잡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두라니 왕국과 맞붙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결국 두라니 왕조를 개국했으며 두라니 왕조 역사상 최고 영토를 가진 전투 군주 아마드 샤 두라니는 델리로 진격한다.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 갈색 말에 앉은 이가 아프간 군주 아마드 샤 두라니이다. 대포들이 >형으로 배치된 것이 보인다.
파니파트 영화에서도 이 전투신이 나온다

Anonymous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전투 과정은 힌디 영화 〈파니파트〉에 잘 나와있다. 마라타 제국은 유능한 인재들이 전투에 대거 참여했음에도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전투 후 파니파트의 패전병들은 아프가니스탄 측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14살이 넘는 소년들은 엄마와 자매 앞에서 참수당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파니파트의 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불명예를 피하려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사다브라오 바우, 그리고 페슈와의 아들 비슈와라오의 시체는 다행히 마라타 군에 의해 회수되어서 힌두 풍습으로 화장되었다. 페슈와 발라지 바지 라오는 이 전투의 패배로 큰 충격을 받고 몇달을 병상에서 앓다가 죽는다. 우울증이 죽음의 주원인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젊은 인재들이 다 죽어버려서 너무 많은 피해를 본 마라타 제국은 다신 회복하지 못한다. 전투 당시에 사다시브라오 바우는 29세, 비슈와라오는 19세였다. 

두라니 왕조의 압달리 또한 피해가 심각했다. 마라타 제국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라타 제국과 평화 협정을 요청해야했다. 그는 페슈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다시브라오 바우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 하며, 마라티가 계속 델리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한다.


Mural of 3rd Battle of Panipat at war-site, Kala Amb, Panipat
파니파트에 있는 파니파트 전투 지역 공원의 3차 전투 묘사 
Sudhirkbhargava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파니파트 세번째 전투는 결국 양쪽 다 출혈만 심한 전쟁이었다. 3차 전투는 심지어 전투 묘사 그림을 구글로 구하기 힘들었다. 양쪽 다 출혈만 큰 전투라서 묘사화를 남길 기분이 아니었나 보다.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로 마라타 제국이 힘이 빠지는 바람에, 마라타가 동쪽 델리와 펀잡에서 서쪽 국가들과 싸우느라 서쪽 영토에 소홀히 할때,  벵갈 지역을 쉽게 장악한 영국은 동쪽으로 진격 쉽게 마라타를 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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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연맹 - 마라티 인들이 세운 힌두교 제국

영화 〈파니파트〉에 나온 마라타 제국의 영토


마라타 제국 Maratha Empire



마라티 제국은 인도 중부 마하라슈트라 주의 마라티 인들이 세운 나라로 1700년대에 인도의 북부와 중부 대다수를 점령한 18세기 인도 대륙의 강호였다.


무굴제국은 제국의 부흥을 이끈 황제 아우랑제브(타지 마할을 만든 샤 자한의 손자)가 1707년에 죽은 후 쇠퇴의 길을 걷고 1600년대 중반에 세워진 힌두교 국가인 마라티 제국이 1700년대에 대륙을 평정하고 1818년에 영국제국에 의해 해체된다.


무굴제국 최대 영토 1700년 
Gabagool / CC BY
마라타 제국 1760년 
Charles Colbeck / Public domain

영인도 제국 1909년 
Edinburgh Geographical Institute; J. G. Bartholomew and Sons. / Public domain 


마라타 왕국은 발리우드에서 인기있는 사극 소재인데 인도의 근대 역사가 외국에서 침략해서 세운 무슬림 왕국인 무굴제국 치하 3백년, 힌두교 인도인들이 세운 마라티 제국 150년, 그 후에 새로운 외세인 대영제국의 역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마라티 제국이 짧은 전성기를 누렸음에도 북부 인도인들 특히 힌두교인들이 마라타 제국에 애정을 갖는 것 같다. 


마라타 제국은 힌두교 국가였지만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했다. 그래서 동맹국이나 부하 중에 무슬림도 있었다. 




마라타 제국 vs 마라타 연맹 


마라타 제국은 차트라바티(황제)가 있는 왕국이나 후에 페슈와(수상)인 바지라오가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이 막강해져서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일본이 천황이 명목상의 왕이었고 쇼군이 실제 권력자였던 것처럼 마라타 왕국도 차트라바티는 명목상의 왕이었고 실제 권력자는 페슈와였다. 페슈와 바지라오의 영토는 푸네였다. 그래서 푸네가 마라타 제국의 실질적 수도였다. 황제는 다른 도시에 있었다. 마라타 제국은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많은 힌두교 지역들을 제국 아래로 영입했다. 인도 애국주의자들은 이 나라를 마라타 제국이라 부르는 반면에, 영국 역사학자들은 마라타 연맹(Maratha confederacy)라고 부른다. 영국이 마라타 제국을 해체시키고 식민지화했기때문에 영국 사학자들이 제국보다 연맹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듯. 



Flag of the Maratha Empire
마라타 국기 









마라타 인물



  • 차트라바티 시바지 


Shivaji Rijksmuseum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초상화 
Unknown author / CC BY-SA


시바지 보살레(1630년~1680, 재위기간 1674~1680)는 마라타 제국을 건립한 정복왕이다. 차트라바티는 마라티어로 황제란 뜻이다. 시바지 보슬레는 남인도를 침략해서 마하라슈트라 주의 작은 나라였던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힌두교 전통을 다시 살렸다.

인도에서 인기가 높은 왕으로 대중문화에서 말을 타고 칼을 높게 든 정복왕의 이미지와 함께 어진 왕으로 묘사된다. 마하라슈트라 주의 뭄바이의 국제공항 이름이 차트라바티 시바지 공항이다.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동상
pixabay





  • 바지라오 1세 


바지라오(1700~1740, 재위기간 1720~1740)는 페슈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살의 나이에 페슈와가 된다. 그는 39살에 죽을때까지 정복에 나서서 전승한 명장이었다. 바지라오는 마라타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자신의 영토 푸네에 샤니와르와다 궁전 요새를 지었다. 


샤니와르 와다 궁전 요새
Aakash.gautam / CC BY-SA 

샤니와르 와다 궁전 요새의 정원 
pixabay





뛰어난 정복자이자 통치자였던 바지라오는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정략 결혼한 부인과 사이가 좋았으며 후에 일부일처제 가풍을 어기고 결혼한 두번째 부인 마스타니와 사랑때문에 집안과 싸운 것도 유명하다. 바지라오가 샤니와르 와다 궁전에는 마스타니의 별궁이 있는데 왕궁 밖과 통하는 전용 출입문이 따로 있다고 한다. 바지라오가 집안 사람들로부터 마스타니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해준 곳이다. 



  • 사다시브라오 바우



Sadashivrao bhau
사다시브라오 바우



사다시브라오 바우(1930년~1961)는 바지라오의 조카로, 바지라오의 사후 페슈와가 된 바지라오의 아들 발라지 바지라오의 디완이었다. 디완은 페슈와의 총리. 황제의 총리인 페슈와가 실질적 군주이고 그 군주의 총리가 디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바지라오와 동생의 사이는 각별했는데, 동생은 31살의 나이에 전사했다. 사다시브라오도 30살의 어린 나이에 전사한다. 사다시브라오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20대 때 정치력과 군사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래서 발라지 바지라오의 부인은 남편이 시다시브라오를 차기 페슈와로 앉힐까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파니파트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마라타 제국의 상승세도 꺾인다. 




  • 마스타니  


무슬림 풍의 옷을 입은 마스타니
Mughal School / Public domain


북인도의 라즈푸트 힌두 왕국 분델칸드의 공주. 왕과 페르시안(이란인) 첩 사이에 낳은 딸이다. 엄마가 무슬림이기때문에 마스타니도 무슬림으로 취급받았다. 31살의 늙은 나이에 유부남 바지라오에게 시집갔다. 아버지 왕이 지참금으로 자신의 영토의 1/3을 바지라오에게 떼어줬다. 이 영토는 잔시, 사가르, 칼피이다.마스타니는 바지라오와 사이에 아들 삼셰르 바하두르를 낳았다. 마스타니는 힌두교인처럼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스타니의 엄마가 이란인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마스타니는 무슬림으로 취급받았고, 그녀의 아들 삼셰르 바하두르도 무슬림 취급을 받았다. 바지라오가 삼셰르를 크리슈나라오라고 힌두 이름을 지어주고 힌두 세례를 받게하려고 했으나, 힌두 사제들이 무슬림 엄마의 아들은 무슬림이라며 거절했었다.삼셰르 바하두르는 사다시브라오 바우와 함께 파니파트 전투에서 전사한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살아남아 후에 잔시의 여왕 락시미바이와 함께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다. 영국이 이들과 전투에서 승리 후 마스타니 후손들의 영지를 폐지하고 몰수했다. 그후 후손들은 현재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 락슈미바이 
Rani of jhansi
독립영웅 락슈미바이
British Library / Public domain



잔시의 여왕 락쉬미바이. 잔시는 마스타니의 지참금으로 바지라오의 영토가 된 곳임. 
락쉬미바이는 마라타인이다. 마라티 브라민 집안 출신으로 페슈와 바지라오 2세의 영지 내에서 자랐다.




락슈미바이에 대해서 ☛ https://offhoarder.blogspot.com/2019/07/rani-raximi-bai.html
락슈미바이의 영화 〈마티카르니카 잔시의 여왕〉 ☛ https://offhoarder.blogspot.com/2019/08/manikarnika.html






마라타 제국을 다룬 영화





파르잔드 Farzand 2018, 마라티어 영화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부하 파르잔드가 단 6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무굴제국이 차지한 판할라 요새를 함락하고 되찾은 전투를 다룬다.


파르잔드는 탄하지 장군이 키운 부하이다. 

마라티어 영화로 저예산이라서 한국 사극 드라마와 비슷한 내용 전개와 퀄리티임. 재미없었다. 












탄하지 Tanhaji 2020, 힌디어 영화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충성스런 장군 탄하지가 콘코다 요새를 되찾은 전투를 다룸.

아제이 데브근이 제작한 영화이다. 
그래서 아제이 데브근이 멋있게 나오는 마초 영화. 









파니파트 Panipat 2019, 힌디어 영화



남아시아의 운명을 바꾼 파니파트 3차 전투.


사소한 부분들은 창작이나 큰 에피소드들은 팩트 기반이어서 
꽤 재밌었던 전쟁영화이다. 

바지라오 1세의 아들들과 사다시브라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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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 대사 - 중국에 의술과 무술을 전해준 타밀인






우리나라에서 달마도로 익숙한 달마대사.

중국과 일본에서 더 유명한 달마대사는 원래 인도의 타밀 사람이었다.


인도 타밀나두의 팔라바 왕조에서 왕의 세째 아들로 태어난 보디 다르마는 중국으로 가서 의술과 무술을 전수해줬다.
팔라바왕조는 남인도여행가는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왕조이다. 인기 여행지역인 칸치푸람, 마하발리푸람의 유적들이 팔라바 왕조의 것이다.


















600년대 경 칸치푸람, 팔라바 왕조의 수도



팔라바 왕조에는 건강 증진을 위한 요가학교, 무술 학교 등이 있었으며




인도의 전통 의술도 발달했엇다.
(동양 의술의 뿌리는 인도인가보다. 지금도 인도에서 아유르베다 등 전통 의술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팔라바왕의 셋째 왕자, 보디다르마



보디 다르마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중국으로 떠난다.


사명을 위해 사랑하는 어린 자식들과 아내와 작별을 고하는 보디 다르마.




그렇게 보디다르마는 인도 남쪽 칸치푸람에서 중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인도가 대륙이다보니 남인도에서 출발해서 중국에 도착에 3년이나 걸림.


하지만, 몽매한 중국인들은 인도인 달마에게 텃세를 부린다.




달마는 이 마을 사람들이 자기를 배척하는 것을 알고 마을을 떠난다.

인도영화 보면, 다른 문화에서 온 외국인에게 살갑게 대하던데,
중국 민도는 이와 다른가보다.


그리고 마을에 역병이 돌기 시작하는데,
우한폐렴(신종코로나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이 픽픽 쓰러진다.





어린 아이가 이 역병에 걸리는데, 
중국인들의 검역 방식이 흥미롭다.





거즈로 이 아이의 온몸을 감싼다.


아있는 이 아이의 얼굴도 붕대로 다 감싸버린 후에 



살아있는 아이를 내다 버린다... ...
중국의 오래된 방역 방법이다. 


우한에서 거리에 쓰러진 중국인




2020년에 중국 모습. 저 영화 속 모습과 비슷... ...





보디다르마는 인도 의술로 이 아이를 정성껏 치료한다. 




아이가 완치한 모습을 보자, 그제야 달마에게 달려와서 도움을 청하는 중국인들 




달마는 학교를 세우고 의술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역병으로 고통많은 많은 중국 지역에 이 의술을 전파하고자, 책을 써서 중국 각지에서 온 의사들에게 전한다. 


그리하여, 중국은 역병을 물리치고 다시 평화로와지자,
살육과 강도짓을 한다.




도적떼가 쳐들어와서 살육을 일삼자





달마대사는 인도 전통무술 칼라리로 이들을 퇴치
(쿵푸가 인도무술 칼라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무술도 가르쳐달라고 간청하고, 


달마대사는 소림사 등 무술학교를 세우고 무술을 전수한다.




보디다르마는 무술과 의술을 전수한 소명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보디다르마를 살해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보디다르마를 살해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보디다르마를 살해한다.


와 어메이징 










이 미개한 중국인들은 달마가 인도의 집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지못해서, 
당신의 시체가 여기에 있어야 우리가 질병이 없다면서 죽으라고 한다. 


그리고 달마대사는 응해준다. 



그렇게 중국인들은 달마를 묻어버리고, 

달마가 가르친 무술(쿵푸)와 의술은 중국에 뿌리내리게 된다. 








7aum Arivu에 나온 달마 대사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각색했을까봐, 검색해보니 달마대사가 인도인인 것도 칼라리가 쿵푸의 전신인 것도 다 팩트였음...
최근에 중국의 학자 2명이 소림사를 세운건 달마대사가 아니다 소림사를 세운 것은 달마대사의 직속 제자이다! 빼애액 했다고 하는데 뭐, ㅋㅋㅋ


7aum Arivu에 나온 인도 방역 수준도 흥미롭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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