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파티파트 전투 1526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파니파트
파티파트는 북인도의 하리아나 주에 위치한 인구 120만명의 작은 도시이다. 인도 역사에 중요한 전쟁이 세차례나 벌어진 곳인데, 지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여서가 아니라, 파니파트가 있는 지역이 평원이라서 전쟁하기 수월했기 때문에 세번이나 대전투가 벌여졌다고 한다.
파니파트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전쟁에서 결정권자가 결정적인 판단, 준비 또는 전략이 없어 우왕좌왕하다가 적군에 영토를 내어주는 경우를 말한다. 20세기 인도의 유명한 공군 준장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가 잦은 실수로 인해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패한 것에서 따왔다.
3차 파니파트 전투 당시 인도 대륙. 델리의 북쪽으로 파니파트가 보인다 Charles Colbeck / Public domain |
첫 번째 파니파트 전투
1526년 4월 21일
티무르의 바부르 VS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
결과: 델리 술탄국의 멸망과 무굴제국 창시
가운데 이브라힘 로디의 목이 있다. 아래쪽에 전투 코끼리 Public domain |
바부르는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인도 침략에 나선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와 파니파트에서 전쟁해서 대승을 거둔다. 이브라힘 로디는 이 전쟁에서 죽는다. 이로서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가 끝나고 바부르는 무굴 제국을 개국한다.
바부르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야포(소형 대포)를 약 20기 동원했다고 한다. 델리 술탄 왕조는 바부르 측보다 두 배 이상 많은 5만명의 군인과 무려 1000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하고도 완패했다. 군사 수가 더 많음에도 총이라는 근대 기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나보다.
아브라힘 로디의 묘 하리아나 관광 |
파니파트에는 아브라힘 로디의 묘가 남아있다. 아브라힘 로디는 델리 술탄국의 마지막 왕이다. 묘가 여태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황제의 묘임에도 매우 초라한 것도 인상적이다.
두 번째 파니파트 전투
1556년 11월 5일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VS 힌두왕 헤무
결과: 악바르 대제의 등장과 무굴제국 번영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이 갑자기 죽어서 무굴제국의 후계에 혼란이 생긴 틈에 벵갈 지역의 힌두교 왕 헤무가 힌두교 영토 회복을 위해 델리로 진격했다.
후마윤의 아들로 당시 13살이었던 악바르 대제와 그의 후견인 바이람 칸이 파니파트에서 헤무를 물리쳤다.
헤무왕의 패배. 자세히 보면 전투 코끼리들이 활약하고 있다. 왜 웃고 있니 |
헤무 측은 3만명의 기사와 5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동원했지만 악바르 측의 만 명의 기사에 패했다. 악바르 측은 사상자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헤무 측은 5000명 사상자 발생.
원래 헤무 측이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전투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무 왕이 화살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군대를 지휘할 리더가 사라지니 그의 군사들도 와해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헤무 왕의 전투 코끼리 500마리의 활약이 대단해서, 이를 목도한 무굴제국도 전투 코끼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헤무 왕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거의 죽은 상태로 생포되었다. 현장에서 악바르가 참수했다. 사실은 악바르의 후견인인 바이란 칸이 13살의 악바르에게 헤무의 목을 베라고 시켰으나, 악바르는 시체의 목을 베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바이란 칸이 설득해서 악바르는 목에 칼을 대는 시늉만 하고 바이람 칸이 헤무의 목을 베었다. 그의 목은 카불에 있는 델리 기념문 (Delhi Darwaza)에 내걸렸고, 목 없는 몸은 델리에 있는 푸라나 킬라(Purana Qila)에 걸렸다. 푸라나 킬라는 델리에 있는 가장 오래된 요새이자 관광지로 헤무왕이 자신의 황제 대관식을 한 곳이라고 한다.
힌두 양식으로 지어진 헤무의 참수 기념관 Sudhirkbhargava / CC BY-SA |
파니파트에 헤무의 목을 참수한 장소에 헤무의 참수 이벤트를 기념하는 헤무의 사마디 스딸(Hemu's Samadhi Sthal)가 남아있다.
하리와나 주의 르와리에는 헤무 왕의 하벨리(대저택)이 있다. 그의 대저택은 1540년, 헤무 왕이 무역으로 잘나가던 시절에 포르투갈 스타일로 단장했다고 한다.
르와리(Rewari)에 남아있는 헤무의 하벨리 Sudhirkbhargava / CC BY-SA |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
1761년 1월 14일
마라타 제국의 사히브라오 바우 VS 두라미 왕국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
결과: 마라타 제국의 상승세가 파니파트 전투로 꺾임. 마라타 제국이 약해지면서 영국의 인도 침략이 쉬워져서 불과 50년 후에 마라타 제국(동맹)은 영국에 패하고 와해된다.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의 죽음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된 델리 왕국은 신흥 강호 마라타 제국의 보호 하에 들어간다.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왕국인 두라니 왕조가 들어서자, 마라타의 보호를 받는 무굴 제국은 두라니 왕조에게 마라타의 확장을 막아달라 부탁한다.
당시에 마라타 제국은 델리를 지나 펀잡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두라니 왕국과 맞붙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결국 두라니 왕조를 개국했으며 두라니 왕조 역사상 최고 영토를 가진 전투 군주 아마드 샤 두라니는 델리로 진격한다.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 갈색 말에 앉은 이가 아프간 군주 아마드 샤 두라니이다. 대포들이 >형으로 배치된 것이 보인다. 파니파트 영화에서도 이 전투신이 나온다 Anonymous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
전투 과정은 힌디 영화 〈파니파트〉에 잘 나와있다. 마라타 제국은 유능한 인재들이 전투에 대거 참여했음에도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전투 후 파니파트의 패전병들은 아프가니스탄 측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14살이 넘는 소년들은 엄마와 자매 앞에서 참수당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파니파트의 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불명예를 피하려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사다브라오 바우, 그리고 페슈와의 아들 비슈와라오의 시체는 다행히 마라타 군에 의해 회수되어서 힌두 풍습으로 화장되었다. 페슈와 발라지 바지 라오는 이 전투의 패배로 큰 충격을 받고 몇달을 병상에서 앓다가 죽는다. 우울증이 죽음의 주원인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젊은 인재들이 다 죽어버려서 너무 많은 피해를 본 마라타 제국은 다신 회복하지 못한다. 전투 당시에 사다시브라오 바우는 29세, 비슈와라오는 19세였다.
두라니 왕조의 압달리 또한 피해가 심각했다. 마라타 제국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라타 제국과 평화 협정을 요청해야했다. 그는 페슈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다시브라오 바우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 하며, 마라티가 계속 델리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한다.
파니파트에 있는 파니파트 전투 지역 공원의 3차 전투 묘사 Sudhirkbhargava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
파니파트 세번째 전투는 결국 양쪽 다 출혈만 심한 전쟁이었다. 3차 전투는 심지어 전투 묘사 그림을 구글로 구하기 힘들었다. 양쪽 다 출혈만 큰 전투라서 묘사화를 남길 기분이 아니었나 보다.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로 마라타 제국이 힘이 빠지는 바람에, 마라타가 동쪽 델리와 펀잡에서 서쪽 국가들과 싸우느라 서쪽 영토에 소홀히 할때, 벵갈 지역을 쉽게 장악한 영국은 동쪽으로 진격 쉽게 마라타를 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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