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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파트 Panipat 2019 - 질 수 밖에 없는 전쟁





〈파니파트〉는 인도 대륙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전투를 다룬 힌디어 영화이다. 

마라티 제국 : https://offhoarder.blogspot.com/2020/05/maratha-empire.html
파니파트 전투: https://offhoarder.blogspot.com/2020/05/blog-post_25.html


개봉 전부터 역사 왜곡이라고 비난을 많이 받고 흥행에도 실패했지만, 영화 자체는 꽤 재미있다. 17세기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알게되서 재밌었다. 역사 왜곡이라고 비난 받은 것도 이 전쟁이 힌두교 국가 vs 이슬람 국가 간의 전쟁이기 때문에 

  • 무슬림 왕국의 역사를 또 나쁘게 묘사해서 왜곡시킬 것이라는 비난, 
  • 아프가니스탄의 군주를 아랍 복장으로 입혔다는 비난, 
  • 영화에 잠깐 나오는 군주, 라자스탄의 마하라자 수라즈 말을 탐욕스러운 군주로 묘사해서 라자스탄 주의 자트 커뮤니티를 화나게 만들었다는 점 등의 문제점들이고,
영화의 굵직한 플롯은 사실에 기초했다. 그러니 이런 비난으로 흥행 실패한 것은 억울할 듯. 라자스탄의 자이푸르 등 일부 지역은 이 영화 상영을 철회했었다. 그래서 개봉하자마자 이 영화를 내리는 극장이 많아서 제작비도 못 건졌다.




'수라즈 말' 논란



파니파트 상영을 금지하라며 시위하는 자트 커뮤니티
기사링크



〈파니파트〉에서 라자스탄의 자트 왕 수라즈 말이 아그라 요새를 요구하고 마라타를 돕기를 거절하는 탐욕스런 군주로 왜곡되었다는 것이 알려져서, 라자스탄의 잩 커뮤니티는 〈파니파트〉의 상영을 금지하라며 시위했다. 결국 영화는 11분을 삭제하고 개봉했다. 그럼에도 잩 커뮤니티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아 결국 라자스탄 지역에서 〈파니파트〉는 개봉되지 못하거나 개봉하자마자 상영이 취소되었다.



[팩트] 실제 역사에서 수라즈 말 왕은 정치적으로 혜안을 가지고 전투에도 능한 군주였다고 한다.  파니팥에서 전투를 할 시기에 아그라 요새는 이미 수라즈 말 왕의 소유였다. 마라타 제국이 힌두 왕들을 결집시키고 있을 때, 라지푸트 왕들은 도움은 거절했으나 자트 라즈푸트의 왕인 수라즈 말만이 마라타에 군사와 자금을 지원하고 직접 참여했다고 한다. 

수라즈 말 왕이 전략에 능했음에도, 마라타 동맹은 그의 실질적이고 유용한 제안들을 계속 무시했다. 다른 마라타 왕들은 그의 제안을 좋아했음에도 마라타의 사다시브라오는 수라즈 말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사다시브라오는 이 당시에 29세의 마라타 제국의 2인자였고, 수라즈 말은 50대 초반에 경험 많고 부유한 군주였다. 게다가 수라즈 말의 제안은 부대에 있는 여자들과 가족들을 분리시킬 것, 아프간 군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을 할 것, 자신의 전략을 우선할 것이었다. 29세의 젊은 사다시브라오는 자신의 부인과 헤어지기 싫어서 여자들을 내보내라는 수라즈 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이들의 전투 과정을 보면 수라즈 말의 제안이 옳았다. 수라즈 말은 이 제안이 무시되고도 마라타 동맹군에 남아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마라타 동맹군이 실책만 저지르자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자신이 아프간 군대 뿐 아니라 마라타 군과도 적을 지게 되는 것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이 현명한 왕은 마라타 동맹군과 함께하면 자신들의 군대들도 멸망할 거라는 것을 예견한 듯. 


영화 속의 수라즈 말 모습


결국 제작사는 수라즈 말의 등장 씬 11분을 삭제했다. 완성본에서 수라즈 말은 전쟁에 부대와 자금을 보내는 것으로 잠깐 나온다. 수라즈 말이 실제로 키가 컸기 때문에 영화 속 외모 또한 역사 왜곡이라고 비난받았다.



마하라자 수라즈 말은 파니파트 전투 2년 후인 1763년에 무굴 제국과 전투 중에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고 한다. 당시 나이가 56세였다. (마하라자는 산스크리트어로 great king이라는 뜻)













등장인물




아마드 샤 압달리 - 아프간 제국을 건립한 왕



왕관 가운데 코히누르 다이아몬드


이 왕은 아프간 제국을 건립한 왕이다. 극 중 이름은 아마드 샤 압달리이지만, 실제 이름은 아마드 샤 두라니, 본명은 아마드 칸 압달리이다. 


발리우드의 악동 산제이 더트가 아마드 샤 두라니 왕의 역을 맡았다. 악동 산제이 더트는 59년 생이다ㅋ 

[팩트] 아마드 샤 두리니가 파니파트에서 전쟁할 때 나이가 39세였다고 한다. 산제이 더트는 이 영화 출연 당시에 60살이었는데 두라니 왕은 50세에 죽었다. 게다가 이 왕은 매우 잘생겼다고.
그래서 늙고 외모가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산제이 더트가 이 역을 맡았다고 역사 왜곡이란 비난을 받았다. 참고로 산제이 더트의 엄마, 전설적인 발리우드의 전설적인 배우 나르기스는 매우 아름답다. 산제이 더트도 젊었을땐 엄마를 빼닮아서 예뻤다.

젊고 미남인 아마드 샤 두라니 왕
Colonel Gentil / Public domain



영화 초반에 압달리 왕의 왕관에 코히누르가 박혀 있다. 이 시기에 아마드 샤 두라니 왕은 실제로 코히누르를 소유하고 있었다. 

마라타 제국이 펀잡 지방을 점령하고 그 너머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 마라타 제국의 보호를 받고 있던 무굴 제국의 델리는 아프간 제국에 찾아와 도와줄 것을 청했다. 이는 영화에도 나온다. 외세에 나라를 맡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마드 샤 압둘리 왕은 이 청을 받아들여 델리로 진격한다.



〈파니파트〉에서 압둘리 왕이 델리로 진격하면서 주둔한 아톡 요새의 실제 모습.
현재 파키스탄에 있다.



[팩트] 아마드 샤 두라니 왕은 북인도의 무슬림과 힌두교를 분열시켜서 델리의 왕좌(무슬림)를 굳건히 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이 전략은 먹혀 들어서 무슬림 왕들은 두라니 왕을 지지했다. 마라타 제국은 힌두 왕들에게 마라타를 중심으로 뭉칠 것을 요구했고, 많은 힌두 왕들이 이에 응답했다. 단, 라지푸트 군주들은 응답을 회피하고 거절했다고 한다, 수라즈 말만 제외하고.





사다시브라오 바우 


사다시브라오 역의 아르준 카푸르



영화 〈바지라오 마스타니〉의 주인공 바지라오 1세의 조카. 파니파트 전투 당시 29세.
사다시브라오 바우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페슈와의 총리 격인 디완을 맡으며 수완을 발휘. 차기 페슈와가 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받은 총아였다. 20대에 전쟁과 정치에서 두각을 보였으면서 파니파트 전투에선 실책을 연달아 저지른다.  


영화 속 치마지 아빠의 초상화

사다시브라오 바우의 아버지는 치마지 아빠(Chimaji Appa). 〈바지라오 마스타니〉에서 치마지 아빠의 활약을 볼 수 있다. 그는 바지라오의 7살 어린 동생으로 바지라오가 죽던 해에 32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 당시에 사다시브라오는 10살이었다. 치마지 아빠 또한 바지라오처럼 뛰어난 전사이자 행정가였다. 바지라오와 치마지 아빠의 시대에 마라타 제국이 크게 성장했었다.  


사다시브라오의 할머니 

사다시브라오가 할머니를 만나서 아버지를 회상하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이 할머니는 마스타니를 괴롭혔던 악독 시어머니. 〈바지라오 마스타니〉에서 독하고 못된 어머니/시어머니로 나왔는데 여기서는 인자하고 어진 할머니로 나온다. 






파르바티바이 



파르바티바이 역의 크리티 사논


사디시브라오의 부인. 사다시브라오는 첫째 부인을 사별했고, 4살 어린 파르바티바이와 재혼했다.

[팩트] 영화에서 파르바티바이는 신분이 낮은 여자 의사로 나오지만, 실제 파르바티바이는 높은 귀족의 딸로 당시 마라타 제국의 황제 샤후지의 최측근이었다고 한다. 파르바티바이의 조카는 페슈와의 아들 비슈와스라오의 부인이었다. 





영화에서 파르바티바이는 전쟁을 떠나는 사다시브라오에게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주장하며 "전쟁에서 돌아올 때 또다른 마스타니를 데려올까 겁난다"고 말한다. 결국 사다시브라오도 그녀를 데려가기로 결정한다.


[팩트] 전쟁이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여자들이 위험한 전장터에 따라가겠다는 아이디어가 황당했는데, 실제로 파니파트 전투에 파르바티를 비롯 여자들이 따라갔다고 한다... ... 그 여자들 데려갈 여력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들을 더 데려가는 게 낫지 않나?
그녀들은 전장터로 나가는 여행길에 다른 여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했다고 한다. 놀러간 듯... ...

당연히 속도도 늦어진다. 영화 속에서도 후반부에 여자들이 있기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므로 속도전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하라자 수라즈 말은 여자들을 내보내고 게릴라 전으로 아프간 군과 싸우자고 했다. 마라타 군은 귀족 여인들과 그들을 보필하는 군솔이 많았기 때문에, 속도가 중요한 게릴라 전도 할 수 없었다.





귀족 여자 분들이 식솔과 온갖 살림 도구를 가져온 장면. 영화에서 사다시브라오는 파르바티바이에게 소꼽놀이 하냐고 화를 내지만 신혼이다 보니 결국 파르바티가 원하는대로 다 해준다.



아내들이 따라간 여행이라 임시 텐트도 화려하게 차리고 사령관들도 화려하게 차려입음. 놀러간 듯... ...




아내들이 따라간 여행이라서 먹는 것도 엄청 잘 먹는다. 저 시절 인도는 건설 현장의 일꾼에게도 고기가 들어간 맛있는 밥이 제공되는 풍족한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기동성과 물자 확보가 중요한 전쟁에서 저렇게 식솔들 우르르 끌고가서 잘 차려먹고 먹다니... ... 

[팩트] 결국 이들은 나중에 식량이 떨어져서 전투에 임박했을 때는 설탕물만 먹고 버텨야 했다. 그것도 군사들이 설탕물을 마셨지, 사다시브라오, 파르바티, 비슈와스라오는 노블리스 오블레쥬로 설탕물도 부하에게 양보하기 위해, 단식 중인 척 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심지어 사다시브라오는 전투 당일에 자신의 설탕물을 파르바티바이에게 노나준다. 전투는 체력 소모가 엄청 큰데 군대가 설탕물만 마시거나 단식 하며 싸웠다니... ..


아무리 봐도 이 신혼 부부들 놀러 갔음. 왼쪽부터  바르바티바이, 당시에 명장 소리 듣던 사다시브라오 바우, 페슈와의 19살난 아들 비슈와스라오 그리고 그의 부인이자 바르바티바이의 조카 라디카바이(당시 15세)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 군이 처참하게 처발린 후, 남은 여자들과 파니파트 주민들은 아프간 군에게 끔찍하게 학살당한다. 많은 여자들이 강간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파르바티 바이와 라디카바이는 다행히 도주에 성공한다. (이 여자들의 도주를 돕느라 군대 인력이 얼마나 소비됐을지...)

파르바티바이는 2년 후 폐렴에 걸려 만 29세에 죽었다. 그녀가 죽은 뒤에 그녀의 화장은 사다시브라오의 아내로서  사티(남편의 죽음을 따라 아내도 불태우는 풍습)로 치뤄졌다고 한다. 사다시브라오의 미망인임에도 마라타 제국은 그녀를 기리는 기념물은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동행이 파니파트의 실패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나 뿐은 아닌 듯. 





삼셰르 바하두르





바지라오와 마스타니의 아들. 마스타니가 무슬림의 딸이었기 때문에 삼셰르는 힌두 세례를 받지 못했다. 영화에서 다른 형제들은 삭발했으나 삼셰르만 긴 머리로 나오는 것도 힌두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인 듯. 
페슈와와 배다른 형제이다. 

[팩트] 영화에서 조카인 비슈와스라오, 사촌인 사다시브라오와 사이가 매우 돈독하게 나오는데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삼셰르 바하두르의 후손들은 훗날 락시미바이와 손 잡고 영국군에게 대항한다. 하지만 영국과 전투에서 이들이 패한 후, 영국은 삼셰르 바하두르 후손들의 영토(재산)을 뺏고 가문을 해체시켰다. 그 후로 현재까지 후손들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이브라힘 칸 가르디






영화 초반에 사다시브라오가 침공한 니짐 요새에서 생포한 무슬림 장군. 적군은 참수해야하지만 사다시브라오는 그를 마라타로 포섭한다.(힌두교인 마라타 제국은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했다)  


[팩트] 실제로도 니짐 왕국의 충신이었다가 마라타 제국에 생포된 후 마라타 제국에서 이브라힘 칸 가르디는 당대 가장 강력한 군사인 마라타 군대의 총사령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총사령관이라는 가장 높은 계급장을 단 이는 가르디가 처음이라고 한다. 페슈와의 측근이었고 사다시브라오와도 친했다고 한다. 

하지만 파니파투 전투에서 그는 아프간 측에 생포되는데, 두라니 왕은 그에게 아프간 부대의 높은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회유한다. 하지만 가르디는 변절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보복으로 아프간 군은 그를 죽을대까지 끔찍하게 고문했다고 한다. 

그의 부대는 후에 마라타 제국의 차기 페슈와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나, 마라타 제국이 영국에 패배한 후에, 대영제국은 그의 부대를 해체해버린다. 





비슈와스라오 





페슈와의 아들. 파니파트 전투 당시 19세. 
엄마가 사다시브바오 라오의 인기가 높고, 파니파트 전투에서 승리까지 하면 차기 페슈와가 될까봐 걱정되서 19살 난 아들 비슈와스라오를 전장에 내보낸다. 마라타 제국은 바지라오1세때부터 계속 승리했기 때문에, 마라타 사람들은 아프간 제국과의 파니파트 전투도 손쉽게 이길 거라고 만만하게 생각한 것 같다. 

[팩트] 영화에서처럼 비슈와스라오는 삼촌들과 사이가 매우 돈독했다. 그는 페슈와에게 쓴 편지에서 군사와 식량,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나는 이 전쟁에서 죽어도 된다. 내가 죽어도 페슈와의 대를 이을 형제들이 있다. 하지만 사다시브라오는 죽으면 안된다. 그가 죽으면 우리 마라타 군대에 큰 손실이다'고 간곡히 부탁한다. 그럼에도 페슈와는 제때 지원군을 보내는데 실패한다. 





발라지 바지 라오 (나나 사헤브)





발라지 바지라오 또는 나나 사헤브는 바지라오의 아들이다. 그는 파니파트 전투가 당연히 마라타의 승리일 꺼라고 믿고 있다가 처참하게 처발리고 사랑하는 인재들을 다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먹고 우울증에 걸려서 시름시름 앓다가 몇 달 후에 병사한다. 






고피카바이





페슈와 발라지 바지라오의 아내. 〈파니파트〉에서 악녀 포지션.
[팩트] 마스타니의 악랄한 시어머니가 고디카가 힌두교의 금식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보고 신심이 깊다고 생각하고 며느리로 발탁했다고 한다. (바지라오의 집안인 바트 가문은 힌두교를 정통으로 지키는 집안이었다.) 정통 힌두교식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여자는 집 구석에 쳐박혀 살았다는 뜻이다. 그 시절의 마라타 귀족 여성들은 무술을 배우거나 학문을 배웠다. 후대에 영국군과 싸운 전쟁영웅인 락시미바이도 무술에 조예가 깊었고, 고디카와 같은 시대의 타라바이도 마라타 군의 장군으로써 칼 들고 무굴제국과 싸워서 이긴 귀족 여성이었다. 엄격한 힌두교 교육을 받은 고피카는 집안에 갇혀서 학문도 못배우고 자라서 식견이 매우 좁았다고 한다. 정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함에도 페슈와의 아내라는 정치적 지위를 이용해서, 남편과 자식들을 괴롭혔다고 한다. 

영화에서처럼 비슈와스라오를 파니파트의 전장에 내몬 것도 고디카바이였다. 자신의 남편이 페슈와 자리를 남편의 사촌 사다시브라오에게 물려줄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니파트 전투에 자기 아들 비슈와스라오를 내보내면, 사다시브라오가 파니파트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  페슈와의 아들로 디완인 사다시브라오보다 직급이 높은 자기 아들이 그 성과를 가져가서 돋보일 꺼라고 계산한 것. 방구석에서 기도나 하는  여편네라서 전쟁이 얼마나 잔혹하고 위험한지 몰랐나 봄. 그녀는 심지어 19살 난 아들의 15살 난  아내도 전장에 같이 내보냈다. 

영화에서는 파니파트의 결과로 반성하는 모습이 나오지만, 실제 고디카바이는 파니파트에서 자신의 첫째아들이 죽은 것으로 남편 발라지 바지라오를 탓하며 괴롭혔다고 한다. 결국 발라지는 우울증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비슈와스라오와 발라지 바지라오의 죽음 후 그녀의 관심은 둘째아들 마다브라오에게로 옮겨가,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마다브라오는 발라지 바지라오에 이어 17살의 나이로 페슈와가 되지만 만 27세에 병사한다. 





〈파니파트〉에서 마라타 군이 파니파트 전투까지 가는 과정이 자세히 나온다. 보면서 왜 질 수 밖에 없었는지 따져보는 것이 재밌다. 꽤 잘만든 사극임에도 흥행에 망해서 안타깝다. 





참고자료: 

역대 파니파트 전투 : https://offhoarder.blogspot.com/2020/05/blog-post_25.html
마라타 제국: https://offhoarder.blogspot.com/2020/05/maratha-empire.html







 파티파트 Panipat


힌디어, 2019, 사극







감독: 아슈토시 고와리케르
Ashutosh Gowariker
(조다 악바르 감독)


출연: 아르준 카푸르
Arjun Kapoor
산제이 더트
Sanjay Dutt
크리티 사논
Kriti Sa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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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니파트 전투 - 인도 대륙의 역사를 바꾼 세 번의 전투


첫번째 파티파트 전투 1526 
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파니파트 


파티파트는 북인도의 하리아나 주에 위치한 인구 120만명의 작은 도시이다. 인도 역사에 중요한 전쟁이 세차례나 벌어진 곳인데, 지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여서가 아니라, 파니파트가 있는 지역이 평원이라서 전쟁하기 수월했기 때문에 세번이나 대전투가 벌여졌다고 한다. 


파니파트 신드롬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전쟁에서 결정권자가 결정적인 판단, 준비 또는 전략이 없어 우왕좌왕하다가 적군에 영토를 내어주는 경우를 말한다. 20세기 인도의 유명한 공군 준장이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가 잦은 실수로 인해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패한 것에서 따왔다.  


3차 파니파트 전투 당시 인도 대륙. 델리의 북쪽으로 파니파트가 보인다
Charles Colbeck / Public domain




첫 번째 파니파트 전투 


1526년 4월 21일 
티무르의 바부르  VS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 

결과: 델리 술탄국의 멸망과 무굴제국 창시


가운데 이브라힘 로디의 목이 있다. 아래쪽에 전투 코끼리
Public domain


바부르는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인도 침략에 나선다. 그는 델리 술탄국의 이브라힘 로디와 파니파트에서 전쟁해서 대승을 거둔다. 이브라힘 로디는 이 전쟁에서 죽는다. 이로서 델리 술탄국의 로디 왕조가 끝나고 바부르는 무굴 제국을 개국한다. 


바부르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야포(소형 대포)를 약 20기 동원했다고 한다. 델리 술탄 왕조는 바부르 측보다 두 배 이상 많은 5만명의 군인과 무려 1000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하고도 완패했다. 군사 수가 더 많음에도 총이라는 근대 기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나보다.

아브라힘 로디의 묘
하리아나 관광

파니파트에는 아브라힘 로디의 묘가 남아있다. 아브라힘 로디는 델리 술탄국의 마지막 왕이다. 묘가 여태 남아있는 것도 신기하지만, 황제의 묘임에도 매우 초라한 것도 인상적이다.







두 번째 파니파트 전투




1556년 11월 5일 바부르의 손자 악바르 VS 힌두왕 헤무


결과: 악바르 대제의 등장과 무굴제국 번영 



바부르의 아들 후마윤이 갑자기 죽어서 무굴제국의 후계에 혼란이 생긴 틈에 벵갈 지역의 힌두교 왕 헤무가 힌두교 영토 회복을 위해 델리로 진격했다.  
후마윤의 아들로 당시 13살이었던 악바르 대제와 그의 후견인 바이람 칸이 파니파트에서 헤무를 물리쳤다. 


헤무왕의 패배. 자세히 보면 전투 코끼리들이 활약하고 있다. 왜 웃고 있니



헤무 측은 3만명의 기사와 500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동원했지만 악바르 측의 만 명의 기사에 패했다. 악바르 측은 사상자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헤무 측은 5000명 사상자 발생. 

원래 헤무 측이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전투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무 왕이 화살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군대를 지휘할 리더가 사라지니 그의 군사들도 와해되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헤무 왕의 전투 코끼리 500마리의  활약이 대단해서, 이를 목도한 무굴제국도 전투 코끼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헤무 왕은 의식을 잃은 상태로 거의 죽은 상태로 생포되었다. 현장에서 악바르가 참수했다. 사실은 악바르의 후견인인 바이란 칸이 13살의 악바르에게 헤무의 목을 베라고 시켰으나, 악바르는 시체의 목을 베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바이란 칸이 설득해서 악바르는 목에 칼을 대는 시늉만 하고 바이람 칸이 헤무의 목을 베었다. 그의 목은 카불에 있는 델리 기념문 (Delhi Darwaza)에 내걸렸고, 목 없는 몸은 델리에 있는 푸라나 킬라(Purana Qila)에 걸렸다. 푸라나 킬라는 델리에 있는 가장 오래된 요새이자 관광지로 헤무왕이 자신의 황제 대관식을 한 곳이라고 한다. 


Raja Hemu's 'Beheading Place'
힌두 양식으로 지어진 헤무의 참수 기념관
Sudhirkbhargava / CC BY-SA

파니파트에 헤무의 목을 참수한 장소에 헤무의 참수 이벤트를 기념하는 헤무의 사마디 스딸(Hemu's Samadhi Sthal)가 남아있다. 

하리와나 주의 르와리에는 헤무 왕의 하벨리(대저택)이 있다. 그의 대저택은 1540년, 헤무 왕이 무역으로 잘나가던 시절에 포르투갈 스타일로 단장했다고 한다. 

Colonial architecture in Hemu's Haveli in Rewari
르와리(Rewari)에 남아있는 헤무의 하벨리 
Sudhirkbhargava / CC BY-SA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




1761년 1월 14일
마라타 제국의 사히브라오 바우 VS 두라미 왕국의 아흐마드 샤 두라니

결과: 마라타 제국의 상승세가 파니파트 전투로 꺾임. 마라타 제국이 약해지면서 영국의 인도 침략이 쉬워져서 불과  50년 후에 마라타 제국(동맹)은 영국에 패하고 와해된다. 




1707년 아우랑제브 황제의 죽음 이후 이빨 빠진 호랑이된 델리 왕국은 신흥 강호 마라타 제국의 보호 하에 들어간다.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왕국인 두라니 왕조가 들어서자, 마라타의 보호를 받는 무굴 제국은 두라니 왕조에게 마라타의 확장을 막아달라 부탁한다. 

당시에 마라타 제국은 델리를 지나 펀잡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에, 두라니 왕국과 맞붙게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결국 두라니 왕조를 개국했으며 두라니 왕조 역사상 최고 영토를 가진 전투 군주 아마드 샤 두라니는 델리로 진격한다.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 갈색 말에 앉은 이가 아프간 군주 아마드 샤 두라니이다. 대포들이 >형으로 배치된 것이 보인다.
파니파트 영화에서도 이 전투신이 나온다

AnonymousUnknown author / Public domain

전투 과정은 힌디 영화 〈파니파트〉에 잘 나와있다. 마라타 제국은 유능한 인재들이 전투에 대거 참여했음에도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전투 후 파니파트의 패전병들은 아프가니스탄 측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14살이 넘는 소년들은 엄마와 자매 앞에서 참수당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갔다. 파니파트의 많은 여성들이 강간과 불명예를 피하려고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사다브라오 바우, 그리고 페슈와의 아들 비슈와라오의 시체는 다행히 마라타 군에 의해 회수되어서 힌두 풍습으로 화장되었다. 페슈와 발라지 바지 라오는 이 전투의 패배로 큰 충격을 받고 몇달을 병상에서 앓다가 죽는다. 우울증이 죽음의 주원인이라고 한다.

이 전투에서 젊은 인재들이 다 죽어버려서 너무 많은 피해를 본 마라타 제국은 다신 회복하지 못한다. 전투 당시에 사다시브라오 바우는 29세, 비슈와라오는 19세였다. 

두라니 왕조의 압달리 또한 피해가 심각했다. 마라타 제국이 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라타 제국과 평화 협정을 요청해야했다. 그는 페슈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다시브라오 바우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워 하며, 마라티가 계속 델리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한다.


Mural of 3rd Battle of Panipat at war-site, Kala Amb, Panipat
파니파트에 있는 파니파트 전투 지역 공원의 3차 전투 묘사 
Sudhirkbhargava / CC BY-SA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파니파트 세번째 전투는 결국 양쪽 다 출혈만 심한 전쟁이었다. 3차 전투는 심지어 전투 묘사 그림을 구글로 구하기 힘들었다. 양쪽 다 출혈만 큰 전투라서 묘사화를 남길 기분이 아니었나 보다. 


세 번째 파니파트 전투로 마라타 제국이 힘이 빠지는 바람에, 마라타가 동쪽 델리와 펀잡에서 서쪽 국가들과 싸우느라 서쪽 영토에 소홀히 할때,  벵갈 지역을 쉽게 장악한 영국은 동쪽으로 진격 쉽게 마라타를 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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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타 연맹 - 마라티 인들이 세운 힌두교 제국

영화 〈파니파트〉에 나온 마라타 제국의 영토


마라타 제국 Maratha Empire



마라티 제국은 인도 중부 마하라슈트라 주의 마라티 인들이 세운 나라로 1700년대에 인도의 북부와 중부 대다수를 점령한 18세기 인도 대륙의 강호였다.


무굴제국은 제국의 부흥을 이끈 황제 아우랑제브(타지 마할을 만든 샤 자한의 손자)가 1707년에 죽은 후 쇠퇴의 길을 걷고 1600년대 중반에 세워진 힌두교 국가인 마라티 제국이 1700년대에 대륙을 평정하고 1818년에 영국제국에 의해 해체된다.


무굴제국 최대 영토 1700년 
Gabagool / CC BY
마라타 제국 1760년 
Charles Colbeck / Public domain

영인도 제국 1909년 
Edinburgh Geographical Institute; J. G. Bartholomew and Sons. / Public domain 


마라타 왕국은 발리우드에서 인기있는 사극 소재인데 인도의 근대 역사가 외국에서 침략해서 세운 무슬림 왕국인 무굴제국 치하 3백년, 힌두교 인도인들이 세운 마라티 제국 150년, 그 후에 새로운 외세인 대영제국의 역사로 이어지기 때문에, 마라티 제국이 짧은 전성기를 누렸음에도 북부 인도인들 특히 힌두교인들이 마라타 제국에 애정을 갖는 것 같다. 


마라타 제국은 힌두교 국가였지만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했다. 그래서 동맹국이나 부하 중에 무슬림도 있었다. 




마라타 제국 vs 마라타 연맹 


마라타 제국은 차트라바티(황제)가 있는 왕국이나 후에 페슈와(수상)인 바지라오가 영토를 확장하고 권력이 막강해져서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일본이 천황이 명목상의 왕이었고 쇼군이 실제 권력자였던 것처럼 마라타 왕국도 차트라바티는 명목상의 왕이었고 실제 권력자는 페슈와였다. 페슈와 바지라오의 영토는 푸네였다. 그래서 푸네가 마라타 제국의 실질적 수도였다. 황제는 다른 도시에 있었다. 마라타 제국은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많은 힌두교 지역들을 제국 아래로 영입했다. 인도 애국주의자들은 이 나라를 마라타 제국이라 부르는 반면에, 영국 역사학자들은 마라타 연맹(Maratha confederacy)라고 부른다. 영국이 마라타 제국을 해체시키고 식민지화했기때문에 영국 사학자들이 제국보다 연맹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듯. 



Flag of the Maratha Empire
마라타 국기 









마라타 인물



  • 차트라바티 시바지 


Shivaji Rijksmuseum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초상화 
Unknown author / CC BY-SA


시바지 보살레(1630년~1680, 재위기간 1674~1680)는 마라타 제국을 건립한 정복왕이다. 차트라바티는 마라티어로 황제란 뜻이다. 시바지 보슬레는 남인도를 침략해서 마하라슈트라 주의 작은 나라였던 마라타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힌두교 전통을 다시 살렸다.

인도에서 인기가 높은 왕으로 대중문화에서 말을 타고 칼을 높게 든 정복왕의 이미지와 함께 어진 왕으로 묘사된다. 마하라슈트라 주의 뭄바이의 국제공항 이름이 차트라바티 시바지 공항이다.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동상
pixabay





  • 바지라오 1세 


바지라오(1700~1740, 재위기간 1720~1740)는 페슈와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19살의 나이에 페슈와가 된다. 그는 39살에 죽을때까지 정복에 나서서 전승한 명장이었다. 바지라오는 마라타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자신의 영토 푸네에 샤니와르와다 궁전 요새를 지었다. 


샤니와르 와다 궁전 요새
Aakash.gautam / CC BY-SA 

샤니와르 와다 궁전 요새의 정원 
pixabay





뛰어난 정복자이자 통치자였던 바지라오는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정략 결혼한 부인과 사이가 좋았으며 후에 일부일처제 가풍을 어기고 결혼한 두번째 부인 마스타니와 사랑때문에 집안과 싸운 것도 유명하다. 바지라오가 샤니와르 와다 궁전에는 마스타니의 별궁이 있는데 왕궁 밖과 통하는 전용 출입문이 따로 있다고 한다. 바지라오가 집안 사람들로부터 마스타니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해준 곳이다. 



  • 사다시브라오 바우



Sadashivrao bhau
사다시브라오 바우



사다시브라오 바우(1930년~1961)는 바지라오의 조카로, 바지라오의 사후 페슈와가 된 바지라오의 아들 발라지 바지라오의 디완이었다. 디완은 페슈와의 총리. 황제의 총리인 페슈와가 실질적 군주이고 그 군주의 총리가 디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바지라오와 동생의 사이는 각별했는데, 동생은 31살의 나이에 전사했다. 사다시브라오도 30살의 어린 나이에 전사한다. 사다시브라오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20대 때 정치력과 군사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래서 발라지 바지라오의 부인은 남편이 시다시브라오를 차기 페슈와로 앉힐까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파니파트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마라타 제국의 상승세도 꺾인다. 




  • 마스타니  


무슬림 풍의 옷을 입은 마스타니
Mughal School / Public domain


북인도의 라즈푸트 힌두 왕국 분델칸드의 공주. 왕과 페르시안(이란인) 첩 사이에 낳은 딸이다. 엄마가 무슬림이기때문에 마스타니도 무슬림으로 취급받았다. 31살의 늙은 나이에 유부남 바지라오에게 시집갔다. 아버지 왕이 지참금으로 자신의 영토의 1/3을 바지라오에게 떼어줬다. 이 영토는 잔시, 사가르, 칼피이다.마스타니는 바지라오와 사이에 아들 삼셰르 바하두르를 낳았다. 마스타니는 힌두교인처럼 옷을 입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마스타니의 엄마가 이란인 무슬림이었기 때문에 마스타니는 무슬림으로 취급받았고, 그녀의 아들 삼셰르 바하두르도 무슬림 취급을 받았다. 바지라오가 삼셰르를 크리슈나라오라고 힌두 이름을 지어주고 힌두 세례를 받게하려고 했으나, 힌두 사제들이 무슬림 엄마의 아들은 무슬림이라며 거절했었다.삼셰르 바하두르는 사다시브라오 바우와 함께 파니파트 전투에서 전사한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살아남아 후에 잔시의 여왕 락시미바이와 함께 영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다. 영국이 이들과 전투에서 승리 후 마스타니 후손들의 영지를 폐지하고 몰수했다. 그후 후손들은 현재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 락슈미바이 
Rani of jhansi
독립영웅 락슈미바이
British Library / Public domain



잔시의 여왕 락쉬미바이. 잔시는 마스타니의 지참금으로 바지라오의 영토가 된 곳임. 
락쉬미바이는 마라타인이다. 마라티 브라민 집안 출신으로 페슈와 바지라오 2세의 영지 내에서 자랐다.




락슈미바이에 대해서 ☛ https://offhoarder.blogspot.com/2019/07/rani-raximi-bai.html
락슈미바이의 영화 〈마티카르니카 잔시의 여왕〉 ☛ https://offhoarder.blogspot.com/2019/08/manikarnika.html






마라타 제국을 다룬 영화





파르잔드 Farzand 2018, 마라티어 영화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부하 파르잔드가 단 6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무굴제국이 차지한 판할라 요새를 함락하고 되찾은 전투를 다룬다.


파르잔드는 탄하지 장군이 키운 부하이다. 

마라티어 영화로 저예산이라서 한국 사극 드라마와 비슷한 내용 전개와 퀄리티임. 재미없었다. 












탄하지 Tanhaji 2020, 힌디어 영화



차트라바티 시바지의 충성스런 장군 탄하지가 콘코다 요새를 되찾은 전투를 다룸.

아제이 데브근이 제작한 영화이다. 
그래서 아제이 데브근이 멋있게 나오는 마초 영화. 









파니파트 Panipat 2019, 힌디어 영화



남아시아의 운명을 바꾼 파니파트 3차 전투.


사소한 부분들은 창작이나 큰 에피소드들은 팩트 기반이어서 
꽤 재밌었던 전쟁영화이다. 

바지라오 1세의 아들들과 사다시브라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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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Midsommar 2019 - 안무서운 공포영화




아리 애스터의 두번째 장편 영화 〈미드소마〉는 미국 뉴욕의 대학원생들이 스웨덴의 특별한 커뮤니티의 하지 축제에 놀러가는 이야기이다. 그냥 2시간 30분 내내 사이비 종교 인간들 노는 거 구경하는 영화이다. 










영화 처음에 주인공의 집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인형의 집 같음.


위의 짤에서 오른쪽 부엌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작은 공간에 아기자기하게 몰아넣은 게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세트장이다. 실제 사람 사는 집이면 가스레인지에 후드가 없을 리가 없고 냉장고도 너무 작다.  


위의 짤의 반대편. 구조가 좀 특이한데(침실과 욕실이 왼쪽 문인 듯) 아무래도 세트장이라서 그런 듯.


남자친구의 집인데 화면 구도가 뭔가 연극적이라고 느껴졌다. 


위 거실의 맞은편임. 이것 또한 인형의 집 같음.


그러고보니, 〈유전〉은 오프닝시퀀스가 인형의 집이 실제 집으로 오버랩되며 시작했다. 
아리 애스터 감독이 인형의 집을 좋아하나봄.

위의 장면도 인형의 집 같이 아기자기 예뻤다.


그리고 연극스러운 장면도 많았다.

이 마을이 뭔가 인위적이고 기괴한 풍경이었음.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는... ...

주인공 캐릭터들이 그닥 매력이 없어서 감정 이입이 되지 않다보니, 이들이 곤란을 겪어도 시큰둥했다. 


평면적이고 연극적인 화면들이 예뻤다.


이것 역시 평면적 화면. 세트장들이 다 예뻤다. 








화면은 예쁘긴 한데도 2시간 반 내내 시큰둥하게 봄. 
전혀 안무섭다. 내용도 평범하고. 사이비 종교 얘기 상상가능한 장면들만 나옴.
(이 감독의 전작 〈유전〉도 후반부의 사이비 종교 집회 장면이 그랬었다. 평범한 전개였음)
상영 시간을 90분으로 정하고 편집했으면 더 알차고 재미난 이야기가 됐을 거 같아.













Midsommar


미국, 2019, 호러



★★

감독: 아리 애스터
출연: 플로렌스 퓨
         잭 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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