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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녀임을 나타내는 장신구 : 망갈수트라, 은발찌, 은발가락찌, 붉은 빈디 신두르




1. 결혼목걸이 : 망갈수트라 






인도의 유부녀들은 망갈수트라라고 불리는 결혼 목걸이를 착용한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신부의 목에 검정색 비즈가 엮여있는 검정색이나 노란색 실을 목에 걸어준다.
이 목걸이를 망갈라 수트라, 망갈수트라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로 신성한mangla 실thread란 뜻이다. 

결혼목걸이는 인도 대륙과 스리랑카, 네팔에 널리 퍼진 풍습인데 지역에 따라 망갈라 수트라의 디자인도 다양하다. 




남인도의 망갈수트라



  • 카르나타카 주

콘카니 민족의 기혼녀는 세가닥의 목걸이를 한다.
(콘카니는 카르나타카 주에 사는 민족으로 디피카 파두콘이 콘카니 출신이다) 
콘카니의 결혼목걸이는 '다레마니'라고 부르는 금 목걸이, 
두개의 금색 동전이 달린' 망갈라수트라', 
산호색 비즈가 달린 금목걸이인 '카시탈리'로 
구성된다. 







콘카니의 결혼 목걸이






케랄라 주의 기독교인들의 결혼목걸이 미누


  • 케랄라 주

케랄라 주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미누'라는 이름의 망갈수트라를 쓴다. 
검정색 비즈가 엮인 금목걸이 끝에 십자가가 새겨진 펜던트를 단다. 



  • 타밀나두 

타밀나두에서는 망갈라수트라를 탈리라고 부르는데, 디자인이 30여가지로 다양하다. 신부와 신랑의 카스트에 따라 디자인을 선택한다고 한다. 다른 지역처럼 타밀나두에서도 신랑 측이 망갈수트라를 구입하는데, 대개가 힌두 신들을 상징하는 펜던트를 선택한다고 한다. 



타밀나두에서는 망갈수트라를 탈리라고 부른다.
시바 등 힌두 신의 상징을 펜던트로 사용한다. 출처


강황을 매달은 노란 실. 노란색은 태양의 실이다.
천여년 전의 피지배계급의 망갈수트라가 이랬을 듯.







북인도의 망갈수트라 





  • 안드라프라데시
안드라프라데시와 텔란가나 지역은 두개의 동전 크기의 금색 원판이 나란히 달린 목걸이를 쓴다. 
하나의 금화는 신부, 다른 하나는 신랑을 의미한다고



mangalsutra by Parekh Cards



  • 구자라트 
구자라트 지역과 마르와 사람들(Marwaris:라자스탄, 히라이냐, 네팔에 사는 민족)들은 금줄에 다이아몬드 펜던트를 단 망갈라슈트라를 쓴다. 이건 전통은 아니고 최근에 시작한 유행이다.
2018년 11월에 결혼한 디피카 파두콘의 망갈수트라의 커다란 다이아몬드 펜던트는 20 라크 루피 (약 2만8천달러)로 추정된다고 한다. 

디피카 파두콘의 망갈수트라. 

발리우드 스타 디피카 파두콘은 남인도 케랄라 주의 콘카니 민족 출신이다. 반면에 란비르 싱의 할아버지는 펀잡 지방(현재 파키스탄 지역) 출신으로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뭄바이로 이주했다. 
(구자라트 지역에서 유행하는 다이아몬드 펜던트과 결혼예물은 란비르 싱의 가족이 골랐다.)
디피카 파두콘과 란비르 싱은 작년 말에 이태리에서 북인도 식, 남인도 식으로 번갈아 식을 올렸다.  


2018년 자신의 뭄바이 결혼피로연에서 망갈수트라를 착용한 디피카 파두콘. 

2019년 망갈수트라를 착용한 유부녀 디피카 파두콘











2. 은발찌와 은발가락찌




은색 발찌 또한 결혼한 여자들만 착용하는 액세서리이다. 
옛날이 배경인 인도영화에 보면,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여자의 발목에 은발찌를 채워주는 장면이 종종 나왔는데,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 또는 결혼하자는 의미였던 것. 





원래 발찌로 금(gold)를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금은 태양의 색이고 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색이기 때문에 땅과 가까운 발에 차지 않았는데, 요즘은 결혼식에서 신부의 장신구로 보석이 달린 화려한 금 발찌가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유부녀임을 알리기 위해 일상에서 쓰는 발찌는 여전히 은발찌이다. 발가락찌도 마찬가지이다. 




3. 빈디, 신두르 



작은 물방울이란 뜻의 빈디는 인도 대륙에서 일상적인 액세서리이다. 빈디는 힌두교의 액세서리로 여성 뿐 아니라 남성들도 미간에 빈디를 찍는다. 


⟪피쿠⟫에서 옷 색깔에 맞춰 파란 빈디를 한 디피카 파두콘

여성들은 옷차림 색에 맞춰 다양한 색의 빈두를 한다.
그러나, 붉은색 빈디는 반드시 남편이 있는 여성만 해야한다.  발리우드 영화 ⟪Hunterrr⟫에서 유부녀의 이마의 붉은 점은 남편을 감시하는 감시 카메라의 불빛이라는 농담이 나온다. 붉은 색 빈디는 기혼녀라는 뜻이다. (과부는 빈디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마와 머리의 가르마 경계에 붉은 연료를 바르는 것은 신두르라고 한다. 


⟪타고르 단편극장⟫에서 유부녀. 옷과 색깔을 맞춘 청록색 빈두를 새끼손가락에 붙였다.
유부녀이므로 이마에 붉은 빈두, 앞머리에 신두르를 했다  





벵갈 지역에서 신부는 빈디 장식을 눈썹 선을 따라 화려하게 장식한다. 

⟪타고르 단편극장⟫에서 벵갈 신부 모습의 라디카 압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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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 락슈미바이 - 인도 독립 운동의 영웅

thesandiegomuseumofartcollectio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마니카르니카 Raximi bai, Rani of Jhansi


 라니(Rani)는 여왕이라는 뜻, 바이(bai)는 여성을 높혀 부르는 존칭어로 ma'am, 여사의 뜻이. 당시 사람들이 락슈미 왕비를 락슈미 바이로 불러서 락슈미바이가 그녀의 이름처럼 고착된 듯.

 락슈미바이는 1828년 11월 28일에 바라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마하라슈트라 주에서 이주한 마라티계 브라민이었다. 부모는 그녀의 이름을 마니카르니카 탐베(Manikarnika Tambe)로 지었고, 애칭으로 마누(Manu)라고 불렀다. 마누가 4살 때 어머니가 죽었고, 아버지는 비투르 지역(현재 우타르 프라데시의 칸푸르 지역)의 페슈와 바지 라오 2세 밑에서 일했다.  마누도 페슈와 집안에서 살면서 교육받았다. 페슈와 집안 사람들은 마누를 "챠빌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흥겨운'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훗날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나나 사힙과 탄티아 토페와 어릴적부터 친구 사이로 사격, 말타기, 칼싸움, 인도 전통 곡예 스포츠인 말라캄바(Mallakamba)를 함께 배웠다고 한다.


Nana Saheb Peshwa of Bithoor
나나 사힙 Anonymous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Tantiatope
탄티아 토페, 1859년 영국군에게 생포된 모습
via Wikimedia Commons


Performing mallakhamb
말라캄바 Adarsh Upadhyay [CC BY-SA 2.0]





잔시의 왕비 시절 



마니카르니카는 1942년 만14세때 31살 연상인 잔시의 마하라자(왕) 강가다르 라오 네왈카르와 결혼했고, 결혼 후 이름으로 락쉬미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1951년에 22살일때 아들 다모다르 라오를 낳았는데 4개월 후 죽었다. 왕(마하라자) 강가다르 라오 넬와카르는 사촌으로부터 아난드 라오를 입양하고 죽을때 그 입양한 아들에게 다모다르 라오의 이름을 주었다. 마하라자는 영국 관료에게 남긴 유서에 이 아이를 존경을 가지고 (왕으로) 대할 것이며, 잔시의 정부를 자신의 미망인(락슈미바이)에게 넘긴다고 명했다.
Rani of Jhansi, watercolour on ivory, c. 1857
라니 락슈미바이의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
National Army Museum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러나, 1953년 마하라자가 죽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총독 달하우지 경은 다모다르 라오가 입양아라는 핑계로 그의 왕위계승권을 무효로 명하고 잔시 영토를 합병해버린다. 락슈미바이 왕비는 이를 듣고 '나의 잔시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1854년 3월, 락슈미바이는 6만 루피의 연금을 보장받고, 잔시 궁에서 쫓겨났다. 

잔시에서 왕비 시절에도 락슈미바이는 아침식사 전에 근력운동과 레슬링, 장애물건너뛰기 등의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섭정 시절, 락슈미바이는 단순한 옷차림을 즐겨 입은 지적인 여성으로 사업가 마인드로 잔시를 통치를 했다고 한다.










잔시요새의 전경,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1857년 인도 저항 운동 봉기



1857년 5월, 미루트에서 인도 저항 운동(세포이 항쟁)이 발생하자, 라니 락슈미바이는 자신의 보호를 목적으로 군대를 꾸릴 수 있게 해달라고 동인도회사에 요청해서 허락을 받아낸다. 락슈미바이는 할디 쿰쿰(Haldi KumKum, 기혼여성들이 결혼생활과 남편의 안녕을 비는 의식)을 열고, 기혼여성들에게 무장하고 싸울 준비를 할 것을 촉구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영국군들은 전부 겁쟁이들이고 자신들을 두려워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영화 ⟪마니카르니카⟫에서 라니 락슈미바이가 할디 쿰쿰을 주최한 장면






1857년 6월,  제12 벵갈연대(the 12th Bengal Native Infantry)의 반란군이 잔시 요새를 점령하고 영국군들과 가족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살육하고 보석과 무기를 약탈했다.  이 학살에 락슈미바이가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다. 반란군들이 락슈미 바이에게 잔시 성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고 받아낸 거금을 들고 떠난 뒤, 락슈미바이는 텅 비어버린 잔시 행정부를 맡을 책임감을 느끼고 영국군 책임자 에스킨 소령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편지를 썻고, 소령은 영국 정부가 사람을 보낼 때까지만 책임지라고 답장했다. 이때, 마하라자 강가다르 라오의 조카인 사다시브 라오 왕자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라니의 군대가 진압했다.


잔시 요새, 1900년, via Wikimedia Commons 



잔시는 영국군은 떠난 상태이고, 20대인 젊은 라니가 섭정을 맡은 상태라서 주위 왕국인 오르차(Orchha)와 다티아(Datia)가  잔시를 나눠 가질 계산으로 잔시를 침략한다. 라니 락슈미바이는 영국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잔시의 영국군 학살이 라니 락슈미바이라고 믿는 영국군은 도움 요청을 묵살한다. 결국 락슈미바이는 요새를 무장시키고, 전 잔시 왕국의 남아있는 군인들과 반란군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 다티아와 오르차 연합군을 무찌른다. 



라니의 통치 아래 잔시에 평화가 왔다. 다모다르 라오의 왕위와 락슈미바이의 섭정을 인하지 않은 영국군은 '통치자가 없는' 잔시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잔시와 부근까지 철저히 무장하고 있고 잔시 요새가 무장하고 철벽 방어중인 것을 보게된다. 영국군의 휴 로즈는 잔시 성의 항복을 요구하며 거절할 경우, 성을 파괴할 거라고 협박한다. 여왕 락슈미 바이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공포하고 이들을 무찌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1858년 3월 24일에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고, 영국군의 포탄 세례에 잔시 요새는 파괴된다. 잔시는 독립군의 대장 타티아 토페(락슈미바이의 어린시절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타티아가 보낸 2 만명 이상의 군대도 패배해버린다. 




Statue of Jhalkari Bai
잘리키바이의 동상
MulberryMukne [CC BY-SA 4.0]

영화 ⟪마니카르니카⟫에서 잘키리바이의 모습. 시골 평민출신으로 락슈미바이의 측근이자 전략가였던 잘키리바이는 락슈미바이에게 탈출을 권하고, 스스로 락슈미바이로 분장해서 영국군을 속였다고 한다. 영화에도 이 에피소드가 나온다.




라니는 성을 포기하고 타티아 토페 또는 나나 사힙의 조카 라오 사힙에게로 도망치라는 측근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전설에 따르면 라니는 어린 다모다르 라오를 등에 업고, 성 위에서 자신의 애마 바달 위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들이 무사해졌을 때 말은 죽었다고. 


The place from where Rani Lakshmibai jumped
라니 락쉬미바이가 말 위로 뛰어내린 곳 Avinashmaurya [CC BY-SA 3.0]


호위병들과 함께 칼피로 물러난 라니 락슈미바이는 진을 치고 군대를 준비시키나, 바로 쫓아온 영국군에 의해 또 패배했다. 






잔시 요새의 내부, 잔시가 배경인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잔시요새의 내부, 뒤의 풍경이 예전에 라니 락슈미바이가 전투를 벌인 곳,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라니 락슈미바이의 최후



라니 락슈미바이, 타티야 토페, 반다의 나왑, 라오 사힙 등 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다시 도망쳐야 했다. 그들은 괄리오르로 가서 그곳을 점령한 인도군에 합류한다. 그들은 나나 사힙을 마라타의 페슈와로 선포하고 라오 사힙을 괄리오르의 통치자로 명한다. 락슈미바이는 곧 영국군의 공격이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 그들에 대항하여 괄리오르를 수비해야 한다고 지도자들을 설득하나 실패한다. 결국 1958년 6월 16일 휴 로즈 장군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1858년 6월 17일, 영국군과 전투를 지휘하던 락슈미 바이가 전사하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라니 락슈미바이는 인도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영국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말에서 내린 그녀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영국군과 싸우다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은 기병대 차림을 한 여왕은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자신의 시체가 영국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태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자 지역민들이 화장했다고 한다. 휴 로즈 장군은 이 전투의 보고서에서 라니 락슈미 바이가 매력적이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며 인도 지도자 중 가장 위험한 사람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이 치뤄졌으며 라니 락슈미 바이의 재와 유골이 괄리오르 산의 타마린느 나무 아래에 묻힌 것을 봤다고 기록했다. 



Equestrienne statue of Rani Laxmibai - panoramio
아들을 등에 업은 라니 락슈미바이의 동상, Ganesh Dhamodkar [CC BY 3.0]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ani_of_Jhansi
        https://en.wikipedia.org/wiki/Jhalkarib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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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바트] 라탄 싱의 실제모델인 라트나심하의 최후




메와 왕국의 왕, 구히르 왕조의 라왈 분파의 마지막 왕, 라트나심하 


델리 술탄국의 알라우딘 킬지에게 함락당한 메와 왕국의 마지막 왕은 라트나심하(Ratnasimha, 재위 1302~1303)이다. 그는 영화 ⟪파드마바트⟫에서 라탄 싱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이 영화가 원작으로 삼은 말릭 무하마드 자야시의 1540년 작품 ⟪파드마바트⟫에서는 라탄 센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파드마바티의 남편의 실존 모델이라고 한다. 역사학자들이 파드마바티가 실존인물이 아닐 거라고 믿는 것에 반해, 라트나심하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다리바 사원에 1302년에 그가 16개의 금화를 봉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그가 재위한 시절에 그의 이름으로 발행한 금화 또한 종종 발견되기 때문이다. 14세기에 한 왕국의 왕이었음에도 기록이 매우 부족하고 그의 일생에 대한 논란도 많은데, 라트나심하가 역사의 패자이기 때문에 기록이 거의 남자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라트나심하의 치토가르 요새 by Ssjoshi111 [CC BY-SA 3.0], from Wikimedia Commons 


라자스탄, 구자라트 지역의 패권인 구히라 왕조(Guhira Dynasty)의 두 분파, 라왈 분파(Rawal branch)와 라나 분파(Rana branch) 중 라트나심하는 라왈 분파의 마지막 왕이다. (라트나심하가 알라우딘 킬지에게 패배해서 라왈 왕조는 라트나심하를 마지막으로 대가 끊어지고, 킬지가 델리로 돌아간 후에, 라왈 분파의 방계 가족이 이 지역(메와)에서 힘을 모아 시소디아 라즈풋 왕조를 일으킨다. 시소디아 왕조의 역사는 1300년대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다)

역사 기록에서 라트나쉬마의 종말



영화 ⟪파드마바트⟫에서처럼 라트나심하가 라즈풋의 기개를 드높이는 장렬한 죽음을 맞았을까에 대해선 역사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왜냐하면, 신빙성있는 기록들은 이 왕이 실제로 살아남아서 항복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믿고싶지 않다 이거냐?)



무슬림 사관의 기록:

1303년 델리 술탄국의 지배자 알라우딘 칼지가 메와 왕국의 견고한 요새(현재지명: 치토르)를 침략할 때, 기록관인 아미르 쿠스라우가 동행했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치토르의 지배자(라트나심하)가 알라우딘에게 항복했다고 한다.(치토르의 왕은 겁에 질려 덜덜 떨고있었다고 적었다.)  메와를 함락한 알라우딘 킬지는 하루 동안 30000명의 힌두교도들을 학살했지만, 치토르 지배자와 그의 가족들은 사면해줬다고 한다. 알라우딘은 자신의 어린 아들 키즈르 칸khizr Khan을 치토르의 지배자로 앉히고 말릭 샤힌을 실질적인 행정관으로 앉혔다. 그리고 치토르를 키즈라바드khizrabad로 이름을 바꾼 뒤 델리로 돌아갔다. 



아미르 쿠스라우의 기록은 14세기의 무슬림 사관인 지아우딘 바라니와 이사미의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이 기록이 정확할 것이라고 본다. 
다른 역사학자는 알라우딘 킬지가 하룻동안 3만명의 힌두교도를 학살하게 명령하면서 그들의 지배자인 왕은 살려뒀을까 의문을 갖는다. 













자인교도 작가의 기록:

자인교도 작가인 카카 수리는 1336년에 쓴 나비난다나 지노다라 프라반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알라우딘은 치토르의 왕을 생포했다. 그의 전재산을 몰수한 뒤에, 그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원숭이같이 끌고다니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사실 영화 ⟪파드마바트⟫에서조차 라탄 싱은 무력해보였다




힌두교 역사가의 기록:

그럼, 라트마쉬마와 같은 힌두교 신자인 역사가의 기록은 어떨까? 1460년에 쓰여진  쿰발가르 프라샤스티는 구히라 왕조, 라나 분파의 쿰바카르나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라트마심하는 떠났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이 '떠났다'가 천국으로 떠났다 즉 용감하게 싸워서 죽었다는 뜻이라는 주장과, 문맥상 말 그대로 떠났다, 즉 도망쳤다는 뜻이라는 주장이 둘 다 있다.




알라우딘 킬지의 치토르 포위가 있은 지 200년이 지나서 1500년대에 나온 시 ⟪파드마바트⟫에서는 라탄 센이 알라우딘이 메와에 오기도 전에 쿰발네르의 왕과 싸우다 전사했다고 나온다. 17세기 라즈풋 역사가도 그가 전투 중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내 추측에는, 라즈풋 왕 라트나심하의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 것 같다. 1300년대의 기록들은 그가 전투에서 죽지 않았고 비굴하게 항복했고, 원숭이처럼 끌려다니는 수모를 당했다고 적혀있다. 그와 그의 가족(그는 부인이 15명이었다)은 알라우딘 킬지가 사면해주었다고 (킬지의 사관에 의해) 적혀있지만,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원숭이처럼 끌려다녔다는 기록, 그리고 그의 대에서 라왈 가계가 끊겼고, 불가 몇년 후에 이 지역에서 방계 가족이 시소디아 왕조를 다시 세웠음에도 라트나시마의 후손에 대한 기록조차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천민 카스트로 떨어지는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추측일 뿐이다) 그래서 몇백년 후에, 문학작품으로 '아름다운 부인을 탐하는 사악한 무슬림 폭군에 맞서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왕'으로 재탄생시켜서 이 수모의 서러움을 달래준 게 아닐까 싶다. 라즈풋의 기개와 의리를 보여주는 ⟪파드마바트⟫의 조하르 또한 이 라즈풋 왕과 그의 가족들, 라즈풋들이 당시에 겪은 수모를 달래고 잊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이때 조하르가 실제로 행해졌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고 한다. 다만 힌두교 라즈풋 역사가들은 그 시절에 라즈풋 여성들이 조하르를 실행하곤 했으니까, 킬지의 치토르 함락때도 분명 있었을 거다!라고 주장할 뿐이다)




이렇게 적고나니, 파드마바티 이야기는 라즈풋의 자존심을 세우려고 만들어진 전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즈풋들은 의리, 충정, 불의를 못참는 성격 등으로 유명한데, 라즈풋들은 라즈풋 왕인 라트나심하가 무슬림 왕에게 항복하고 수치를 당했다는 기록을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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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제도1] 인도의 카스트caste에 대해서-바르나VARNA와 자티JATI


John Haslam [CC BY 2.0 o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인도영화나 기사를 접하다 보면, 카스트에 관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인도영화에서 사람들이 카스트 차이 때문에 박해당하고
연인이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마체테로 도륙당하는 장면이 종종 나오는데
가만 보면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을 쓰고 있다.

인도에서 신분을 이유로 차별하고 해코지을 하는 것이
2010년대에도 벌어지는 일인 것이다.


글로벌 시대인 21세기에도 이런 차별이 존재하는 이유가 왜일까 궁금해져서,
카스트에 대해 검색을 해보면
카스트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네 계급으로 이뤄져 있다는 단편적인 내용만 나온다.
그래서 영어 웹을 검색해보면,
내가 인도인이 아니라 외부인이고 카스트에 대한 내 관심도 제한되어 있다 보니,
카스트가 무엇인지 더 모호해지고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검색하고 알게 된 것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정도 개념이 정리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처음에 카스트가 한국의 본적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조선 시대에서 '아무개를 시조를 둔 무슨 성씨 누구의 몇 대손 양반'이라고
표현했던 본적과 인도의 카스트가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었는데,
본적보다 더 크고 복잡하며 모호한 개념인 것 같다.


소설 ⟪6인의 용의자⟫에서 고향과 성만으로 카스트를 어림짐작하고,
영화 ⟪카쉬미르의 소녀⟫에서 피부색이나 채식을 하는 것을 보고 카스트를 따지거나,
인터넷에서 이슬람을 믿는 샤룩 칸과 힌두교를 믿는 가우리 칸의 결혼을
인터카스트(카스트 간) 결혼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보면
카스트는 브라민,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네 계급으로 나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개념이고 21세기 일상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터카스트 결혼이라고 하는 샤룩 칸의 결혼. 연애결혼했다.


카스트는 4계급으로 나누는 혈통 중심의 바르나 Varna 뿐 아니라,
직업으로도 나누는 카스트가 있다. 이것을 자티라고 부른다.
옛날 영국 성 smith가 대장장이에게 붙은 성이고 Smithson은 대장장이의 후손,
Taylor가 재단사에서 나온 성이고 Taylorson은 그 후손이란 뜻의 성인 것처럼,
인도에서도  어부들, 어선 제작자, 농부, 군인 등 직업으로 카스트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성이나 카스트 공동체 이름을 듣고 높은 카스트인지 아닌지 짐작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카스트는 힌두교도들만 따지는 것이라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인도에서 기독교인들, 불교도들, 무슬림들의 카스트가 있다.
(기독교인과 자인교도들도 카스트간의 결혼을 매우 금기시한다.
인도에서 의식 수준 높다는 케랄라주에서 2018년에 카스트가 다른 기독교인들끼리 결혼했는데,
결국 신랑이 살해당했다.)
















몇천년 전의 인도는 직업으로 구분되는 자티Jäti가 있었고 자티 간 결혼은 금기시되었었다.
그런데 이것에 혈통의 개념을 강화하고 카스트라고 제도화한 것은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진출한 포르투갈, 스페인 정복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이 150년간 인도를 지배하면서 카스트 제도를 없애기는커녕,
지배하는 데 이용하고 강화했다고 한다.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를 근대화시키는 것에는 전-혀 관심없고, 약탈만 철저하게 했나보다.)

Unknown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지금까지 내가 알게 된 카스트, 그러니까 유명한 카스트가  라즈풋, 자트, 바르 등 몇 개가 있는데,
전부 다 북인도 카스트이다.
그리고 남인도 영화계에서는 스타 중에는 천민 출신이 꽤 많은데,
북인도 영화인 발리우드에서는 천민 출신 스타감독이나  스타배우를 찾아보기가 힘들고,
족벌주의가 매우 심하며,
발리우드 영화가 곧잘 카스트 색을 지우는 것을 보아(영화 내에서 카스트에 대한 언급을 피한다)
남인도보다 북인도가 카스트를 추종하는게 더 심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추측이 별로 설득력이 없는 것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카스트 때문에 벌어지는 명예살인은 남인도에서도 종종 일어난다.
인도 내에서 교육 수준이 높다는 케랄라주는 2018년 상반기에 두건이나 발생해서
인도에서 '케랄라가 명예살인으로 북인도와 경쟁하려나 보다'는 기사도 나왔다.)


북인도가 2천 년 넘게 북쪽에서 침략해온 세력에 의해 지배당했고,
그 지배세력(무굴제국 같은 이슬람 국가, 또는 백 훈족 등) 또한 포르투갈이나 영국처럼
카스트를 체제 유지에 활용한 것을 생각하면 카스트의 영향력이 남인도보다
더 뿌리 깊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한다.
(인도에서 검은 피부를 하대하고 흰 피부를 높은 카스트로 받아들이는 흰 피부 숭배 문화도
북인도를 침략하고 상위 카스트로 군림한 흰 피부의 북방민족에 의해 퍼진 것 같다)



인도에서 카스트는 침략자들에게 유용한 지배 수단이었기 때문에
한반도가 19세기에 계급사회의 붕괴를 겪고 20세기 초에 근대화를 겪으면서 신분제와 결별한 것과 달리,
인도는 원래 있던 카스트가 침략자의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강화되고 20세기 중반에 독립한 후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의 계급제도야 500년밖에 안 된 것이지만(그전에는 고려왕조의 귀족 계급체제였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4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배이념에 의해 강화되고 이용된 체제라서
식민지에서 독립한 후인 20세기 후반의 70년으로 십여 억의 인도인의 뼈 속 깊이 박힌 카스트 마인드를 뿌리뽑기는 힘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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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트렌스젠더 히즈라

Hijra



인도에서는 트렌스젠더 중에 남자의 몸에 여자정체성 지닌 이들을 히즈라라고 부른다.
힌디로 히즈라이고, 다른 지역은 다르게 불린다. 아라바니 Aravani, 아루바니 Aruvani 차카Chhakka 등.
히즈라들은 키나르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키나르는 전설 속 존재로 춤과 음악에 능한 전설속 인물이라고 한다. (출처:영문위키)
히즈라는 인도 내 각 문화권마다 다르게 불려도 하지만 사회적 소외계층인 점이나 하는 일은 비슷하다.




소설 ⟪6인의 용의자⟫에서, 주인공 원주민이 바라나시에 갔을때 그를 거둬준 사람이 히즈라였다.

'히즈라들은 따로 공동체를 이루고, 지역 사회의 결혼식이나 아기 탄생 행사에 축복의 춤과 노래를 제공하거나 성매매·구걸 등을 해서 먹고 산다. 대체로 사회적으로 소외당하는 데다 일부에선 병원 출입을 거부당할 정도로 천대받기도 한다.'(출처: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siapacific/633062.html)




⟪6인의 용의자⟫에도 히즈라들이 바리나시 골목 안에 모여 서로 도우며 살고 있었다. 주인공 원주민이 인도대륙에 오니, 키 150cm에 피부가 새까맣다고, 외모만으로 천대와 모욕을 받는데, 히즈라인 돌리가  그를 거둬들이고 따뜻하게 챙겨주는 모습이 짠했다.
돌리는 높은 카스트의 부잣집 아들이었는데, 어릴때 일찍이 자신이 남과 다름과 인식하고 결혼해야할 나이가 되자 집에서 가출해서 지저분한 바리나시에 와서 다른 히즈라와 모여 산다.
돌리는 긍지가 높고 마음이 따뜻한 히즈라였다. 그래서 책 통틀어서 원주민 에케티를 유일하게 차별하지 않은 인도인이었다.(참피도 차별안했지만, 참피는 눈이 안보이니 예외)


히즈라는 돌잔치, 결혼식 행사에 가서 떠들석한 장면을 연출하고 돈을 받는다. (옛날 우리나라에 각설이가 하던 일과 비슷한 듯) ⟪6인의 용의자⟫에서 은행에서 이들을 고용해서 채무자 직장에 가서 판을 벌이라고 의뢰한다. 그래서 히즈라들이 빚쟁이의 직장에 몰려가서 야단법석 노래를 불러대며 채무자를 망신을 줬다가, 주도적 역할을 한 돌리는 나중에 크게 보복을 당한다. (소외계층인지라, 그냥 채무자가 사주한 깡패들에게 잔인하게 살인당했는데도 법적 보호를 전혀 못받는다. 범인들은 잡히지 않고 히즈라들은 억울함을 하소연하지도 않는다ㅠㅠ)


















영화 ⟪퀸⟫의 초반에 라니(강가나 라나우트)의 결혼식장에 히즈라들이 노래를 부르며 등장하자,
집주인이 얼른 나가라고 애원한다. (히즈라의 등장이 그닥 환대받는 느낌이 아니었다)


히즈라가 뭔지 몰랐으면, 그냥 손님 온 줄 알았을 듯.



내 깡패같은 애인의 타밀 리메이크인 ⟪카다룸 카단두 포금Kadhalum Kadandhu Pogum 2016⟫에도
파티 장면에 어김없이 히즈라가 등장한다.





위 두사진에서 오른쪽 여자분이 히즈라. 신난 축제 분위기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히즈라.

⟪6인의 용의자⟫와 ⟪퀸⟫은 북인도(델리)가 배경인데
⟪카다룸 카단두 포금⟫은 남인도(첸나이)가 배경이다.
히즈라가 집단생활을 하며 파티 등에 동원되는 것은 남인도도 마찬가지인가보다.



북인도의 델리가 배경인 소설 ⟪델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에서도 히즈라가 등장한다.
(인도는 우리나라에 비해 트랜스젠더가 흔한가보다. 대중문화에 자주 나오는 거 보니.
인구수가 13억이 훌쩍 넘으니 트랜스젠더의 퍼센티지는 적어도 숫자가 많은가보다.)
⟪델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주인공인 스웨덴 남자가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새집이라고 히즈라들이 들이닥쳐서 노래를 부르며 판을 벌여 이 스웨덴 백인 남자가 혼비백산이 된다.

이 소설에 따르면 (인도)사람들은 히즈라가 저주를 내리는 힘이 있다고 믿고 두려워한다고 한다.
'히즈라는 새로 이사온 집이나 사내아이가 태어난 집을 찾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새집이나 아기에게 축복을 해준다. 만약 돈을 주지 않으면 저주를 내린다.
히즈라는 자신들이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제3의 성응ㄹ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는 마라하자 시대나 무굴제국시대에 할렘을 지키던 환관들이었다. 그들 나름의 카스트도 가지고 있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교리를 적절히 뒤섞은 나름의 종교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내가 읽은 인도 소설 6인의 용의자에 뭔 지 모르는 게 자꾸 나와서
그때마다 찾아보다가, 헷갈리는게 자꾸 누적되니
정리하는 중인데,
6인의 용의자는  히즈라는 힌즈라라고 책에 나와있었다. 등장인물 중 1명이 히즈라인데 꾸준히 힌즈라라고 써놨음. 
일부러 그런건가? 
푸딩인 수지 카 할와도 아이스크림이라고 써놨던데.  
번역때문에 더 헷갈린 게 아닌가 싶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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