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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녀임을 나타내는 장신구 : 망갈수트라, 은발찌, 은발가락찌, 붉은 빈디 신두르




1. 결혼목걸이 : 망갈수트라 






인도의 유부녀들은 망갈수트라라고 불리는 결혼 목걸이를 착용한다.  
결혼식에서 신랑이 신부의 목에 검정색 비즈가 엮여있는 검정색이나 노란색 실을 목에 걸어준다.
이 목걸이를 망갈라 수트라, 망갈수트라라고 부른다. 산스크리트어로 신성한mangla 실thread란 뜻이다. 

결혼목걸이는 인도 대륙과 스리랑카, 네팔에 널리 퍼진 풍습인데 지역에 따라 망갈라 수트라의 디자인도 다양하다. 




남인도의 망갈수트라



  • 카르나타카 주

콘카니 민족의 기혼녀는 세가닥의 목걸이를 한다.
(콘카니는 카르나타카 주에 사는 민족으로 디피카 파두콘이 콘카니 출신이다) 
콘카니의 결혼목걸이는 '다레마니'라고 부르는 금 목걸이, 
두개의 금색 동전이 달린' 망갈라수트라', 
산호색 비즈가 달린 금목걸이인 '카시탈리'로 
구성된다. 







콘카니의 결혼 목걸이






케랄라 주의 기독교인들의 결혼목걸이 미누


  • 케랄라 주

케랄라 주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미누'라는 이름의 망갈수트라를 쓴다. 
검정색 비즈가 엮인 금목걸이 끝에 십자가가 새겨진 펜던트를 단다. 



  • 타밀나두 

타밀나두에서는 망갈라수트라를 탈리라고 부르는데, 디자인이 30여가지로 다양하다. 신부와 신랑의 카스트에 따라 디자인을 선택한다고 한다. 다른 지역처럼 타밀나두에서도 신랑 측이 망갈수트라를 구입하는데, 대개가 힌두 신들을 상징하는 펜던트를 선택한다고 한다. 



타밀나두에서는 망갈수트라를 탈리라고 부른다.
시바 등 힌두 신의 상징을 펜던트로 사용한다. 출처


강황을 매달은 노란 실. 노란색은 태양의 실이다.
천여년 전의 피지배계급의 망갈수트라가 이랬을 듯.







북인도의 망갈수트라 





  • 안드라프라데시
안드라프라데시와 텔란가나 지역은 두개의 동전 크기의 금색 원판이 나란히 달린 목걸이를 쓴다. 
하나의 금화는 신부, 다른 하나는 신랑을 의미한다고



mangalsutra by Parekh Cards



  • 구자라트 
구자라트 지역과 마르와 사람들(Marwaris:라자스탄, 히라이냐, 네팔에 사는 민족)들은 금줄에 다이아몬드 펜던트를 단 망갈라슈트라를 쓴다. 이건 전통은 아니고 최근에 시작한 유행이다.
2018년 11월에 결혼한 디피카 파두콘의 망갈수트라의 커다란 다이아몬드 펜던트는 20 라크 루피 (약 2만8천달러)로 추정된다고 한다. 

디피카 파두콘의 망갈수트라. 

발리우드 스타 디피카 파두콘은 남인도 케랄라 주의 콘카니 민족 출신이다. 반면에 란비르 싱의 할아버지는 펀잡 지방(현재 파키스탄 지역) 출신으로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뭄바이로 이주했다. 
(구자라트 지역에서 유행하는 다이아몬드 펜던트과 결혼예물은 란비르 싱의 가족이 골랐다.)
디피카 파두콘과 란비르 싱은 작년 말에 이태리에서 북인도 식, 남인도 식으로 번갈아 식을 올렸다.  


2018년 자신의 뭄바이 결혼피로연에서 망갈수트라를 착용한 디피카 파두콘. 

2019년 망갈수트라를 착용한 유부녀 디피카 파두콘











2. 은발찌와 은발가락찌




은색 발찌 또한 결혼한 여자들만 착용하는 액세서리이다. 
옛날이 배경인 인도영화에 보면, 남자가 무릎을 꿇고 여자의 발목에 은발찌를 채워주는 장면이 종종 나왔는데, 결혼을 전제로 사귀자 또는 결혼하자는 의미였던 것. 





원래 발찌로 금(gold)를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금은 태양의 색이고 신을 상징하는 신성한 색이기 때문에 땅과 가까운 발에 차지 않았는데, 요즘은 결혼식에서 신부의 장신구로 보석이 달린 화려한 금 발찌가 많이 사용된다. 
하지만, 유부녀임을 알리기 위해 일상에서 쓰는 발찌는 여전히 은발찌이다. 발가락찌도 마찬가지이다. 




3. 빈디, 신두르 



작은 물방울이란 뜻의 빈디는 인도 대륙에서 일상적인 액세서리이다. 빈디는 힌두교의 액세서리로 여성 뿐 아니라 남성들도 미간에 빈디를 찍는다. 


⟪피쿠⟫에서 옷 색깔에 맞춰 파란 빈디를 한 디피카 파두콘

여성들은 옷차림 색에 맞춰 다양한 색의 빈두를 한다.
그러나, 붉은색 빈디는 반드시 남편이 있는 여성만 해야한다.  발리우드 영화 ⟪Hunterrr⟫에서 유부녀의 이마의 붉은 점은 남편을 감시하는 감시 카메라의 불빛이라는 농담이 나온다. 붉은 색 빈디는 기혼녀라는 뜻이다. (과부는 빈디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마와 머리의 가르마 경계에 붉은 연료를 바르는 것은 신두르라고 한다. 


⟪타고르 단편극장⟫에서 유부녀. 옷과 색깔을 맞춘 청록색 빈두를 새끼손가락에 붙였다.
유부녀이므로 이마에 붉은 빈두, 앞머리에 신두르를 했다  





벵갈 지역에서 신부는 빈디 장식을 눈썹 선을 따라 화려하게 장식한다. 

⟪타고르 단편극장⟫에서 벵갈 신부 모습의 라디카 압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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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 락슈미바이 - 인도 독립 운동의 영웅

thesandiegomuseumofartcollectio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마니카르니카 Raximi bai, Rani of Jhansi


 라니(Rani)는 여왕이라는 뜻, 바이(bai)는 여성을 높혀 부르는 존칭어로 ma'am, 여사의 뜻이. 당시 사람들이 락슈미 왕비를 락슈미 바이로 불러서 락슈미바이가 그녀의 이름처럼 고착된 듯.

 락슈미바이는 1828년 11월 28일에 바라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마하라슈트라 주에서 이주한 마라티계 브라민이었다. 부모는 그녀의 이름을 마니카르니카 탐베(Manikarnika Tambe)로 지었고, 애칭으로 마누(Manu)라고 불렀다. 마누가 4살 때 어머니가 죽었고, 아버지는 비투르 지역(현재 우타르 프라데시의 칸푸르 지역)의 페슈와 바지 라오 2세 밑에서 일했다.  마누도 페슈와 집안에서 살면서 교육받았다. 페슈와 집안 사람들은 마누를 "챠빌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흥겨운'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훗날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나나 사힙과 탄티아 토페와 어릴적부터 친구 사이로 사격, 말타기, 칼싸움, 인도 전통 곡예 스포츠인 말라캄바(Mallakamba)를 함께 배웠다고 한다.


Nana Saheb Peshwa of Bithoor
나나 사힙 Anonymous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Tantiatope
탄티아 토페, 1859년 영국군에게 생포된 모습
via Wikimedia Commons


Performing mallakhamb
말라캄바 Adarsh Upadhyay [CC BY-SA 2.0]





잔시의 왕비 시절 



마니카르니카는 1942년 만14세때 31살 연상인 잔시의 마하라자(왕) 강가다르 라오 네왈카르와 결혼했고, 결혼 후 이름으로 락쉬미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1951년에 22살일때 아들 다모다르 라오를 낳았는데 4개월 후 죽었다. 왕(마하라자) 강가다르 라오 넬와카르는 사촌으로부터 아난드 라오를 입양하고 죽을때 그 입양한 아들에게 다모다르 라오의 이름을 주었다. 마하라자는 영국 관료에게 남긴 유서에 이 아이를 존경을 가지고 (왕으로) 대할 것이며, 잔시의 정부를 자신의 미망인(락슈미바이)에게 넘긴다고 명했다.
Rani of Jhansi, watercolour on ivory, c. 1857
라니 락슈미바이의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
National Army Museum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러나, 1953년 마하라자가 죽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총독 달하우지 경은 다모다르 라오가 입양아라는 핑계로 그의 왕위계승권을 무효로 명하고 잔시 영토를 합병해버린다. 락슈미바이 왕비는 이를 듣고 '나의 잔시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1854년 3월, 락슈미바이는 6만 루피의 연금을 보장받고, 잔시 궁에서 쫓겨났다. 

잔시에서 왕비 시절에도 락슈미바이는 아침식사 전에 근력운동과 레슬링, 장애물건너뛰기 등의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섭정 시절, 락슈미바이는 단순한 옷차림을 즐겨 입은 지적인 여성으로 사업가 마인드로 잔시를 통치를 했다고 한다.










잔시요새의 전경,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1857년 인도 저항 운동 봉기



1857년 5월, 미루트에서 인도 저항 운동(세포이 항쟁)이 발생하자, 라니 락슈미바이는 자신의 보호를 목적으로 군대를 꾸릴 수 있게 해달라고 동인도회사에 요청해서 허락을 받아낸다. 락슈미바이는 할디 쿰쿰(Haldi KumKum, 기혼여성들이 결혼생활과 남편의 안녕을 비는 의식)을 열고, 기혼여성들에게 무장하고 싸울 준비를 할 것을 촉구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영국군들은 전부 겁쟁이들이고 자신들을 두려워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영화 ⟪마니카르니카⟫에서 라니 락슈미바이가 할디 쿰쿰을 주최한 장면






1857년 6월,  제12 벵갈연대(the 12th Bengal Native Infantry)의 반란군이 잔시 요새를 점령하고 영국군들과 가족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살육하고 보석과 무기를 약탈했다.  이 학살에 락슈미바이가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다. 반란군들이 락슈미 바이에게 잔시 성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고 받아낸 거금을 들고 떠난 뒤, 락슈미바이는 텅 비어버린 잔시 행정부를 맡을 책임감을 느끼고 영국군 책임자 에스킨 소령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편지를 썻고, 소령은 영국 정부가 사람을 보낼 때까지만 책임지라고 답장했다. 이때, 마하라자 강가다르 라오의 조카인 사다시브 라오 왕자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라니의 군대가 진압했다.


잔시 요새, 1900년, via Wikimedia Commons 



잔시는 영국군은 떠난 상태이고, 20대인 젊은 라니가 섭정을 맡은 상태라서 주위 왕국인 오르차(Orchha)와 다티아(Datia)가  잔시를 나눠 가질 계산으로 잔시를 침략한다. 라니 락슈미바이는 영국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잔시의 영국군 학살이 라니 락슈미바이라고 믿는 영국군은 도움 요청을 묵살한다. 결국 락슈미바이는 요새를 무장시키고, 전 잔시 왕국의 남아있는 군인들과 반란군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 다티아와 오르차 연합군을 무찌른다. 



라니의 통치 아래 잔시에 평화가 왔다. 다모다르 라오의 왕위와 락슈미바이의 섭정을 인하지 않은 영국군은 '통치자가 없는' 잔시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잔시와 부근까지 철저히 무장하고 있고 잔시 요새가 무장하고 철벽 방어중인 것을 보게된다. 영국군의 휴 로즈는 잔시 성의 항복을 요구하며 거절할 경우, 성을 파괴할 거라고 협박한다. 여왕 락슈미 바이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공포하고 이들을 무찌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1858년 3월 24일에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고, 영국군의 포탄 세례에 잔시 요새는 파괴된다. 잔시는 독립군의 대장 타티아 토페(락슈미바이의 어린시절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타티아가 보낸 2 만명 이상의 군대도 패배해버린다. 




Statue of Jhalkari Bai
잘리키바이의 동상
MulberryMukne [CC BY-SA 4.0]

영화 ⟪마니카르니카⟫에서 잘키리바이의 모습. 시골 평민출신으로 락슈미바이의 측근이자 전략가였던 잘키리바이는 락슈미바이에게 탈출을 권하고, 스스로 락슈미바이로 분장해서 영국군을 속였다고 한다. 영화에도 이 에피소드가 나온다.




라니는 성을 포기하고 타티아 토페 또는 나나 사힙의 조카 라오 사힙에게로 도망치라는 측근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전설에 따르면 라니는 어린 다모다르 라오를 등에 업고, 성 위에서 자신의 애마 바달 위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들이 무사해졌을 때 말은 죽었다고. 


The place from where Rani Lakshmibai jumped
라니 락쉬미바이가 말 위로 뛰어내린 곳 Avinashmaurya [CC BY-SA 3.0]


호위병들과 함께 칼피로 물러난 라니 락슈미바이는 진을 치고 군대를 준비시키나, 바로 쫓아온 영국군에 의해 또 패배했다. 






잔시 요새의 내부, 잔시가 배경인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잔시요새의 내부, 뒤의 풍경이 예전에 라니 락슈미바이가 전투를 벌인 곳,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라니 락슈미바이의 최후



라니 락슈미바이, 타티야 토페, 반다의 나왑, 라오 사힙 등 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다시 도망쳐야 했다. 그들은 괄리오르로 가서 그곳을 점령한 인도군에 합류한다. 그들은 나나 사힙을 마라타의 페슈와로 선포하고 라오 사힙을 괄리오르의 통치자로 명한다. 락슈미바이는 곧 영국군의 공격이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 그들에 대항하여 괄리오르를 수비해야 한다고 지도자들을 설득하나 실패한다. 결국 1958년 6월 16일 휴 로즈 장군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1858년 6월 17일, 영국군과 전투를 지휘하던 락슈미 바이가 전사하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라니 락슈미바이는 인도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영국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말에서 내린 그녀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영국군과 싸우다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은 기병대 차림을 한 여왕은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자신의 시체가 영국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태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자 지역민들이 화장했다고 한다. 휴 로즈 장군은 이 전투의 보고서에서 라니 락슈미 바이가 매력적이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며 인도 지도자 중 가장 위험한 사람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이 치뤄졌으며 라니 락슈미 바이의 재와 유골이 괄리오르 산의 타마린느 나무 아래에 묻힌 것을 봤다고 기록했다. 



Equestrienne statue of Rani Laxmibai - panoramio
아들을 등에 업은 라니 락슈미바이의 동상, Ganesh Dhamodkar [CC BY 3.0]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ani_of_Jhansi
        https://en.wikipedia.org/wiki/Jhalkarib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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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타 Kurta와 쿠르티 Kurti


쿠르타 (출처: pixabay)




쿠르타 Kurta

쿠르타는 우븐 소재로 된 pull-over 타입의 상의이다. 즉, 앞면에 절개가 없어서 머리 위로 입는 튜닉과 비슷한 블라우스/셔츠인데, 길이가 무릎까지 내려온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쿠르타는 언뜻 보면 원피스 드레스처럼 보이는데 쿠르타는 반드시 하의를 입고 착용하는 상의이고 원래 남성들이 입는 옷이다. 여성이 입는 쿠르타는 쿠르티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은 남인도에서도 쿠르타를 입지만 원래 쿠르타가 북인도와 네팔,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에서 입는 옷인 것으로 봐서 기원이 (북인도를 정복한) 이슬람 제국에서 나온 문화일 거 같았으나, 검색해보니 아니다. 알려진 기원은 없고, 쿠르타라는 단어는 산스크리트어에서 나온 말이다. 쿠르타는 인도에서 오래전부터 입던 인도전통의상으로 북인도와 남인도 뿐 아니라 스리랑카 등 인도와 국가에서도 많이 입는다.  예전에 인도였던 파키스탄과 인접한 아프가니스탄에도 쿠르타와 비슷한 페라한이라는 옷을 즐겨 입는다.

남인도(텔루구) 영화 ⟪Yatra⟫에서 쿠르타와 도티 차림인 맘무티




개인적으로 쿠르타에 사드리를 입는 것이 매우 예뻐보인다. 사드리는 소매 없는 조끼 형태의 옷으로 네루가 즐겨 입어서 네루 재킷이라고도 부른다. 요즘은 모디 총리가 즐겨입어서 모디 재킷이라고도 부름.


Gandhi and Nehru in 1946
쿠르타와 사드리 차림의 네루 (출처: Wikimedia Commons)


쿠르타와 사드리를 즐겨 입는 모디 총리 (출처: 크렘린궁 웹사이트)











쿠르티 Kurti

남성용 옷인 쿠르타보다 길이가 짧은 풀오버 블라우스를 쿠르티라고 부른다.  쿠르티를 검색해보면 쿠르타보다 더 긴 맥시 드레스 길이의 쿠르티도 많은 것을 보면, 여성용 쿠르타를 쿠르티라고 통칭하는 것 같다. 



다양한 디자인의 쿠르티를 입은 발리우드 스타, 캉가나 라나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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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헹가 Lehenga

Manish Malhotra lehenga for wedding by metromela/ Under Creative Commons license











 레헹가는 인도 의상 중에 내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이다. 근래 몇 년간, 하이 웨이스트 팬츠나 풀스커트에 짧은 상의를 입는 것이 유행해서 레헹가도 내 눈에 예뻐보인 지는 모르겠다. 내가 풀 스커트와 가슴과 등이 파인 옷을 좋아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발리우드 스타들이 고급스럽고 화려한 레헹가를 자주 입기 때문에 예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긴 천을 몸에 감아 몸매를 가리는 사리에 비해 레헹가는 짧은 탑으로 몸매를 드러낼 수 있고 화려한 자수와 비즈 장식을 할 수 있어 확실히 매우 화려해 보인다.








 레헹가는 발목 길이의 풀 스커트(full skirt, 풍성하게 퍼지는 스커트)로 촐리(choli)라고 부르는 길이가 짧은 블라우스와 몸 중앙의 노출 부분을 가릴 두파타(dupatta 긴 스카프)와 함께 입는다.

 레헹가는 북인도에서 10세기부터 입기 시작했는데, 무굴 시대에(1100년대~1800년대) 널리 유행하기 시작한 옷이라고 한다. 초창기에는 면으로 만든 옷이었는데, 무굴 시대에 왕족들이 입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장식을 새긴 실크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레헹가는 신부의 웨딩드레스나 결혼식, 파티 등에서 입는 의상으로 인기이다. 북인도 옷이지만 남인도에서도 결혼식 때 많이 입는다고 한다.



영화 ⟪파드마바트⟫에서 파드마바티 왕비가 입은 레헹가. 이 영화는 무굴 시대인 1300년대 라자스탄이 배경이다.
레헹가는 촐리, 레헹가, 그리고 배 둘레를 가린 두파카로 구성되었다. 


변형된 레헹가로 가라라(gharara)와 샤라라(sharara)가 있다. 둘 다 무굴 제국 시절에 북인도에 들어온 이슬람 옷이라고 한다. 샤라라는 주름이 많이 잡힌 통이 넓은 바지라서 언뜻 보면 치마처럼 보인다. 가라라는 샤라라의 변형으로 허리에서 허벅지까지는 딱 붙고 무릎 바로 위에 밴드가 있으며 그 밴드부터 A형으로 퍼진다. 둘 다 19세기에 등장한 옷으로 무슬림 결혼식에 많이 입었다고 한다.(이 치마바지는 현재 시대가 배경인 북인도 영화나 파키스탄 영화에 종종 나온다.)


가라라 Gharara by theseasonsstore.in/Under Creative Commons license

 남인도에는 레헹가와 비슷한 풀스커트로 랑가 보니langa voni와 랑가 다바니 langa dhavani가 있다. 남인도에서 어린 10대 여자가 많이 입는다고 한다. 풀스커트와 짧은 블라우스, 스카프를 두른 이 옷은 사리와 비슷해보이기 때문에 half saree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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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ra the best fashionista in Padmaavat



영화 ⟪파드마바트⟫에서 고라는 라탄 싱의 충신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많지 않았음에도, 아름다운 의상과 액세서리로 눈에 많이 띄었다.

⟪파드마바트⟫의 의상은 스타 배우들((디피카파두콘, 란비르 샤히드, 아디티)은 림플과 하프리트 나룰라가 맡았고, 조연들은 막시마 바수가 디자인했다. 그리고 엑스트라들은 찬드라칸트 소나완, 아제이 크므르가 담당했는데, 주연배우들의 의상보다 조연이나 엑스트라의 의상들이 더 예뻤다.

그 중에 가장 예뻤던 바수의 의상들을 모아봤다.




고라의 의상은 대개 밝은 색으로 삭막한 라즈스탄 풍경과 잘 어울렸다.
잔잔한 패턴들을 레이어링했다.




파란색이든 붉은색이든 밝은 색상에 얌전한 패턴으로 매치했는데, 칙칙한 중년남성의 외모에 매우 잘 어울리고 화사해보이게 한다.





낮에는 밝은 색의 옷을 입다가
어두운 밤이 되니 어두운 색 옷을 입는 패셔니스타 고라.
웃도리에 목걸이 모양으로 금색 자수가 놓여있다.




고라는 고향의 왕궁에서는 화사하고 밝아서 편안한 분위기를 내는 의상을 주고 입고,
위급한 상황에 왕비를 모시고 적군으로 갈 때는
차분한 느낌의 짙은 색상의 옷을 입었다.

 이 옷 또한 매우 우아해서 감탄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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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드마바트]에서 라탄 싱의 의상 - 이것이 라즈풋 패션이다!



Ratan Singh's costumes in Padmaavat; Beautiful and bold jewelry for men.











영화 ⟪파드마바트⟫는 산제이 릴라 반살리 감독의 영화로 이 감독은 아름답고 화려한 화면으로 유명하다.
그의 영화는 배경, 배우, 옷차림 등 모든 것이 눈부시게 화려하다.

1303년, 인도의 메와 왕국(현재 라자스탄 주)를 배경으로 하는 ⟪파드마바트⟫는 고증을 철저하게 한 영화라고 하는데, 여기에 나오는 의상들이 얼마나 고증에 철저한지는 전혀 모르겠다.


19세기, 20세기의 마하라자(라자스탄 왕을 뜻한다. 왕비나 여왕은 마하라니라고 부름)들이 화려한 보석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던 것은 그 시절 사진이 남아있으니 안다. 인도가 1200~1300년대도 정교한 보석 세공술이 발달했고 일개 소국의 왕이 보석으로 칭칭 감고 있었을까 궁금하다.


참고: 라탄 싱의 실제모델, 라트나심하의 최후
https://offhoarder.blogspot.com/2018/12/padmaavat-ratnasimha.html













샤히드 카푸르가 연기한 라탄 싱은 메와 왕국의 왕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알록달록한 보석이 남자에게도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도 이렇게나 보석이 잘 어울리는데, 현대 남성 패션은 많이 퇴보한 것 같다.
패션에 있어서 남자는 하면 안되는 게 너무나 많다.






라벤더 컬러에 골드와 버건디를 매치시켰다.




1800년대 라자스탄의 마하라자는
위와 같은 터번 장식을 실제로 했었다.

터번의 뒷모습. 패턴과 패턴의 조합이 다채롭다.











왼쪽 상완의 팔찌.






왕의 내의 또한 매우 고급스러웠다.


귀걸이가 매우 잘 어울린다.




이건 요즘에 파자마로 팔아도 잘 팔릴 듯.

자수도 남자에게 매우 잘 어울린다.


초상화가 그러진 펜던트 목걸이는
모굴제국 시절에 실제로 있었다.
이 옷은 앞여밈에 누빔까지 있어서 한복처럼 보인다.








그리고 왕의 신발도 금빛 수가 정교하게 놓여져있다.
이 영화의 의상디자이너가 옷의 무늬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잘 안보여서 안타까웠다.




배경도 금칠 범벅이라서 화려하고 밝은 옷차림과 잘 어울렸다 .






영화 후반에서는 어둡고 비관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라탄 싱 왕의 의상들이 가벼워졌다.


치렁치렁 걸쳐입은 옷들은 간소화되고 보석들도 종류가 줄어들고 미니멀해졌다.












팔뚝에 맨 보석팔찌도 매우 남성적으로 보인다.






















신기했던 것은 전투복이 우리나라의 것과 비슷했던 거.







전투 양상이 비슷하니 문화권과 상관없이 비슷한 디자인으로 개발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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