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sandiegomuseumofartcollectio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마니카르니카 Raximi bai, Rani of Jhansi
라니(Rani)는 여왕이라는 뜻, 바이(bai)는 여성을 높혀 부르는 존칭어로 ma'am, 여사의 뜻이. 당시 사람들이 락슈미 왕비를 락슈미 바이로 불러서 락슈미바이가 그녀의 이름처럼 고착된 듯.
락슈미바이는 1828년 11월 28일에 바라나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마하라슈트라 주에서 이주한 마라티계 브라민이었다. 부모는 그녀의 이름을 마니카르니카 탐베(Manikarnika Tambe)로 지었고, 애칭으로 마누(Manu)라고 불렀다. 마누가 4살 때 어머니가 죽었고, 아버지는 비투르 지역(현재 우타르 프라데시의 칸푸르 지역)의 페슈와 바지 라오 2세 밑에서 일했다. 마누도 페슈와 집안에서 살면서 교육받았다. 페슈와 집안 사람들은 마누를 "챠빌리'라고 불렀는데, 이는 '흥겨운'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훗날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는 나나 사힙과 탄티아 토페와 어릴적부터 친구 사이로 사격, 말타기, 칼싸움, 인도 전통 곡예 스포츠인 말라캄바(Mallakamba)를 함께 배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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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캄바 Adarsh Upadhyay [CC BY-SA 2.0] |
잔시의 왕비 시절
마니카르니카는 1942년 만14세때 31살 연상인 잔시의 마하라자(왕) 강가다르 라오 네왈카르와 결혼했고, 결혼 후 이름으로 락쉬미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1951년에 22살일때 아들 다모다르 라오를 낳았는데 4개월 후 죽었다. 왕(마하라자) 강가다르 라오 넬와카르는 사촌으로부터 아난드 라오를 입양하고 죽을때 그 입양한 아들에게 다모다르 라오의 이름을 주었다. 마하라자는 영국 관료에게 남긴 유서에 이 아이를 존경을 가지고 (왕으로) 대할 것이며, 잔시의 정부를 자신의 미망인(락슈미바이)에게 넘긴다고 명했다.
라니 락슈미바이의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 National Army Museum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
그러나, 1953년 마하라자가 죽자, 영국 동인도 회사의 총독 달하우지 경은 다모다르 라오가 입양아라는 핑계로 그의 왕위계승권을 무효로 명하고 잔시 영토를 합병해버린다. 락슈미바이 왕비는 이를 듣고 '나의 잔시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외쳤다고 한다. 1854년 3월, 락슈미바이는 6만 루피의 연금을 보장받고, 잔시 궁에서 쫓겨났다.
잔시에서 왕비 시절에도 락슈미바이는 아침식사 전에 근력운동과 레슬링, 장애물건너뛰기 등의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섭정 시절, 락슈미바이는 단순한 옷차림을 즐겨 입은 지적인 여성으로 사업가 마인드로 잔시를 통치를 했다고 한다.
잔시요새의 전경,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
1857년 인도 저항 운동 봉기
1857년 5월, 미루트에서 인도 저항 운동(세포이 항쟁)이 발생하자, 라니 락슈미바이는 자신의 보호를 목적으로 군대를 꾸릴 수 있게 해달라고 동인도회사에 요청해서 허락을 받아낸다. 락슈미바이는 할디 쿰쿰(Haldi KumKum, 기혼여성들이 결혼생활과 남편의 안녕을 비는 의식)을 열고, 기혼여성들에게 무장하고 싸울 준비를 할 것을 촉구했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영국군들은 전부 겁쟁이들이고 자신들을 두려워한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영화 ⟪마니카르니카⟫에서 라니 락슈미바이가 할디 쿰쿰을 주최한 장면 |
1857년 6월, 제12 벵갈연대(the 12th Bengal Native Infantry)의 반란군이 잔시 요새를 점령하고 영국군들과 가족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그들을 살육하고 보석과 무기를 약탈했다. 이 학살에 락슈미바이가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지금도 논란이다. 반란군들이 락슈미 바이에게 잔시 성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고 받아낸 거금을 들고 떠난 뒤, 락슈미바이는 텅 비어버린 잔시 행정부를 맡을 책임감을 느끼고 영국군 책임자 에스킨 소령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편지를 썻고, 소령은 영국 정부가 사람을 보낼 때까지만 책임지라고 답장했다. 이때, 마하라자 강가다르 라오의 조카인 사다시브 라오 왕자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라니의 군대가 진압했다.
잔시 요새, 1900년, via Wikimedia Commons |
잔시는 영국군은 떠난 상태이고, 20대인 젊은 라니가 섭정을 맡은 상태라서 주위 왕국인 오르차(Orchha)와 다티아(Datia)가 잔시를 나눠 가질 계산으로 잔시를 침략한다. 라니 락슈미바이는 영국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잔시의 영국군 학살이 라니 락슈미바이라고 믿는 영국군은 도움 요청을 묵살한다. 결국 락슈미바이는 요새를 무장시키고, 전 잔시 왕국의 남아있는 군인들과 반란군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 다티아와 오르차 연합군을 무찌른다.
라니의 통치 아래 잔시에 평화가 왔다. 다모다르 라오의 왕위와 락슈미바이의 섭정을 인하지 않은 영국군은 '통치자가 없는' 잔시를 재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잔시와 부근까지 철저히 무장하고 있고 잔시 요새가 무장하고 철벽 방어중인 것을 보게된다. 영국군의 휴 로즈는 잔시 성의 항복을 요구하며 거절할 경우, 성을 파괴할 거라고 협박한다. 여왕 락슈미 바이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공포하고 이들을 무찌른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1858년 3월 24일에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고, 영국군의 포탄 세례에 잔시 요새는 파괴된다. 잔시는 독립군의 대장 타티아 토페(락슈미바이의 어린시절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나, 타티아가 보낸 2 만명 이상의 군대도 패배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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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는 성을 포기하고 타티아 토페 또는 나나 사힙의 조카 라오 사힙에게로 도망치라는 측근의 조언을 받아들인다. 전설에 따르면 라니는 어린 다모다르 라오를 등에 업고, 성 위에서 자신의 애마 바달 위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들이 무사해졌을 때 말은 죽었다고.
라니 락쉬미바이가 말 위로 뛰어내린 곳 Avinashmaurya [CC BY-SA 3.0] |
호위병들과 함께 칼피로 물러난 라니 락슈미바이는 진을 치고 군대를 준비시키나, 바로 쫓아온 영국군에 의해 또 패배했다.
잔시 요새의 내부, 잔시가 배경인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
잔시요새의 내부, 뒤의 풍경이 예전에 라니 락슈미바이가 전투를 벌인 곳, 영화⟪Badrinath Ki Dulhania⟫에서 |
라니 락슈미바이의 최후
라니 락슈미바이, 타티야 토페, 반다의 나왑, 라오 사힙 등 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다시 도망쳐야 했다. 그들은 괄리오르로 가서 그곳을 점령한 인도군에 합류한다. 그들은 나나 사힙을 마라타의 페슈와로 선포하고 라오 사힙을 괄리오르의 통치자로 명한다. 락슈미바이는 곧 영국군의 공격이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 그들에 대항하여 괄리오르를 수비해야 한다고 지도자들을 설득하나 실패한다. 결국 1958년 6월 16일 휴 로즈 장군의 군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1858년 6월 17일, 영국군과 전투를 지휘하던 락슈미 바이가 전사하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라니 락슈미바이는 인도군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영국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말에서 내린 그녀는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영국군과 싸우다 총에 맞아 전사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은 기병대 차림을 한 여왕은 심하게 부상을 입었고, 자신의 시체가 영국군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자신을 태우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녀가 죽자 지역민들이 화장했다고 한다. 휴 로즈 장군은 이 전투의 보고서에서 라니 락슈미 바이가 매력적이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며 인도 지도자 중 가장 위험한 사람이었다고 적었다. 그는 성대한 장례식이 치뤄졌으며 라니 락슈미 바이의 재와 유골이 괄리오르 산의 타마린느 나무 아래에 묻힌 것을 봤다고 기록했다.
아들을 등에 업은 라니 락슈미바이의 동상, Ganesh Dhamodkar [CC BY 3.0] |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Rani_of_Jhansi
https://en.wikipedia.org/wiki/Jhalkaribai